대승기신론, 대행 스님법어

내가 누구인지 모른대서야

혜주 慧柱 2016. 2. 24. 06:52

내가 누구인지 모른대서야

 

나로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으니

 

나는 누구입니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우리가 이 점을 모른다면 라고 고집하는 그 나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나는 나지 뭐긴 뭐야?’ 하실 분도 있을 것이고 나는 부모의 정혈精血을 받아서 태어났고 죽으면 그뿐이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이 숙제를 풀지 않고서는 생명이 뭔지도, 삶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일체 만물만생이 이 세상에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이치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에 나는 나지 뭐긴 뭐야?’ 하신다면 그 나는 육신의 나입니까?, 마음의 나입니까? 몸뚱이만을 나라고 할 수도 없고 마음만을 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설령 육신과 마음을 합친 것을 나라고 한다 해도 그러면 이렇게 버젓이 살아서 보고 듣고 움직이고 생각하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뭐라고 해야 합니까?

죽으면 그뿐이라 한다면 어떻게 있던 것이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육신은 흩어져 흙, , , 바람의 길로 돌아간다지만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마음이 없고 마음 내는 것도 없다면 목석일 것이고, 몸뚱이가 없다면 삶이 무효일 것이며, 정신의 근본이 없다면 그것 또한 무효일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시급한 문제는 이 세상의 깊은 데 얕은 데, 넓은 데 좁은 데를 다 아는 게 아니라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있고서야 우주도 있습니다. 내가 없다면 상대는 무엇이고 우주는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나부터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알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 우주 삼라만상을 압니다. 내가 대천세계이고 대천세계가 나니까 그때는 새삼스레 안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나로 보고 대상을 대상으로 보면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있기에 상대가 있습니다. 내가 없다면 상대가 있을 리 없고 우주도 세상도 없습니다. 물론 괴로움이다, 슬픔이다, 고통이다 하는 경계도 없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상대가 있는 것이고, 세상도 천차만별로 모양을 갖추고 벌어져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없다면 상대는 다 뭐고, 세상의 온갖 모습은 다 무엇이겠습니까? 몽땅 무효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자기가 중심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부터 알아야 상대도 알고 세상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내가 탄생을 안 했다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탄생을 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상대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자랑스러운 게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문제는 나 하나의 탄생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나는 근본을 알면 우주를 아는 게 됩니다. 내가 변하면 우주가 변한 것입니다. 나 이외에 어떤 다른 변화라고 그것은 변화가 아닙니다. 나 이외에 어떤 중심이라도 그것은 진짜 중심이 아닙니다. 나는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근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고 느끼게 하는 근본 말입니다. 또 일체 만물만생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은 뭐라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 좋은 기계를 새로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 기계를 누가 가장 잘 작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만든 사람이 가장 잘할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를 형성시킨 근본이 있다면 그 근본이 우리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 점을 믿는다면 나의 근본은 제쳐 두고서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주장하겠습니까?

집 지어 놓고 들어가 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동차 사서 몰고 다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집이 나를 살리고 자동차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이 육신 껍데기, 또는 라는 형상을 나로 보지 말고 우선 진짜 주인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내 살림살이 내가 알지 남이 더 잘 아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아프면 아픈 대로 긍하면 궁한 대로 내가 잘 압니다. 외롭고 슬프고 즐겁고 기쁘고 더럽고 깨끗하고 크고 작고를 내가 다 압니다.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돌아가는 살림살이, 씀씀이를 내 마음이 잘 압니다. 그리고 그때는 벌써 나의 근본이 알고 우주 전체가 다 압니다. 그렇기에 각자 나부터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집 전화부터 먼저 개통시켜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3층 집을 짓는데 1층은 짓지 않고 2, 3층부터 지으려고 한다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면서 세상일을 알아야 하겠노라 한다면 그 또한 어불성설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서는 내 몸속의 생명들도 다스릴 수 없고 세상일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나의 현재, 과거, 미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게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언제 남을 탓하고 환경 탓하며 바깥일에 시비를 가리자고 할 겁니까? 우선 나부터 알아야 남도 알게 되겠지요. 그러니 나부터 돌아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내가 나의 주인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진짜 나의 하수인, 심부름꾼입니다. 진짜 주인은 우리 몸속의 온갖 생명의 의식들을 다스릴 수 있는, 다스리면서 운행케 할 수 있는 근본 자리입니다. 그걸 뿌리라고 할 수도 있고 선장이라고 할 수도 있고 참나라고 해도 됩니다.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우리가 수십억 년 전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물에서 살다가 겨우 물 밖으로 나왔고 갖은 우여곡절 끝에 돌고 돌아서 지금 인간으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생명에 대한 갖가지 교육을 받은 셈입니다. 그 과정의 시련과 고난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찰나찰나 죽고 사는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때로는 물고기의 몸으로, 때로는 새나 짐승의 몸으로 쫓고 쫓기는 천차만별의 시련도 겪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되었는데 개중엔 짐승에서 갓 넘어온 사람이 있는가하면 여러 번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반복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차원의 높낮이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인간의 몸을 받아 나와서 나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차원의 승화를 도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게 다인 줄 알지만 사람이 새가 되는 수도 있고, 토끼가 되는 수도 있고, 반대로 새가 사람이 되고, 말이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좌천과 승진이 엇갈리는데 그것은 다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체의 세계는 쉴 사이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데 식물이 동물 되고, 동물이 사람 되기를 층층 차원으로 몸을 바꾸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말입니다.

천차만별로 차원도 많습니다. 일일이 따지기 어려울 만큼 많은데 모든 생명체는 하천세계에서 중천세계로, 혹은 상천세계에서 중천세계로 돌고 돌며 몸을 바꾸어 받게 됩니다. 과거에 수없이 탈바꿈을 하면서 자기로 살았었건만 그것을 모르고 현실의 나맘 나인 줄 압니다. 그러니 눈앞에 닥친 일에만 급급해서 이생에 사람 도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짐승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짐승이 사람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게 수레바퀴 구르듯 제 차원대로 다 나누어지니까 우리는 꼼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공부를 해서라고 이 바퀴돌이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보배를 얻는 게 됩니다.

 

 

어쩌다가 이 세상에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개구리 한 마리, 저 날짐승 하나, 비록 풀벌레라고 괜히 태어난 게 아닙니다. 태어날 만하니까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과거 미생물에서부터 수없는 나날들을 거치면서 스스로 애쓰고 노력한 끝에 진화하고 또 진화해서 인간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어찌 잘못 태어났다든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하겠습니까? 인간 세상에 등장했으면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산다면 그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좋은 기회를 놓치는 낭비가 됩니다.

콩을 심었더니 싹이 나왔습니다. 콩은 어디론가 가고 싹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런데 싹이 자라 다시 콩이 열렸으니 콩에서 싹이 나오고 싹에서 콩이 나왔습니다. 이 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콩이 싹으로 화하고 싹이 다시 콩으로 화하니 콩이 없이는 싹이 없고, 싹이 없이는 콩이 없습니다. 이걸 보고 콩과 싹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어제의 콩과 오늘의 콩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또 싹이 콩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서로 넘나들면서 이끌어 주는데 누가 하라 말라 해서도 아니고 자동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싹이 콩을, 새 콩이 헌 콩을 모른다 하고 서로 관계가 없다 하겠습니까?

작년에 거둔 씨를 올봄에 심었더니 싹이 터서 꽃 피고 열매 열려 다시 씨를 얻었습니다. 이때에 작년 씨를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지금의 이 씨를 알아야 작년 씨를 알고 지금의 이 씨의 맛을 알아야 이 씨를 다시 심는 도리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지금의 나를 알아야 하겠다는 겁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

 

흔히들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한 철만 살고 끝나는 인생이라면 살아 있는 동안 저 좋아하는 짓 실컷 하다가 끝내도 되겠지만 몸뚱이가 없어진다 해서 그것으로 종결되는 게 아닙니다. 마치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다시금 계속됩니다. 달리 비유하자면 겨울이 되어 잎이 지더라고 나무의 뿌리는 죽지 않는 것처럼 불씨는 이어져서 봄이 오면 새 순이 돋아나듯 인연 따라 다시금 돌아옵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렇습니다. 저 별들도 그렇습니다. 수명의 길고 짧음은 있을지언정 아주 끝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그만이라는 소리는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몸이 없어지면 무엇이 있어 영원하다 하느냐?

저 벌레를 보세요. 허물을 벗고 고치를 틀고 있다가 나방이 되어 날지 않습니까? 그렇게 몇 차례나 몸을 바꿨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탈바꿈이고 나름대로 도를 닦는 것입니다.

사람도 모습을 바꿀 뿐이지 죽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삶은 허망한 게 아니라 생동력입니다. 살아가는 동안이란 내가 바꿔 입을 옷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고로 닦고 또 닦고 다시 태어나서도 또 닦아야 합니다.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는 데는 어떤 새 옷을 입느냐 하는 문제가 따릅니다. 짐승의 탈을 입느냐 뱀의 탈을 입느냐……. 옷은 가지가지로 많은데 어떤 옷으로 갈아입게 될지는 자기가 살아온 결과에 따르게 됩니다. 지금 짐승처럼 살면 짐승의 탈을 쓰게 될 것이고 지금 독사의 마음으로 살면 독사의 탈을 쓰게 됩니다.

 

 

금생에 우리가 사는 모습도 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와 연결된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 배역을 받은 이상 소임을 충실히 하면서 선하게 살고, 나아가서는 마음 도리를 터득하기에 노력을 해야 합니다.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철칙입니다.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똑바로 살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제법 세련되게 옷을 입고 있지만 더 좋고 편리한 옷이 나왔다면 누구나 바꿔 입고 싶어 할 것입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헐었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죽는다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죽으면 아주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 육신만 흩어져 원점으로 돌아갔다면 다시금 생산이 됩니다. 마치 헌 옷 벗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도 실은 그렇게 골라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늙을수록 젊어집니다. 늙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젊어지려는 과정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니까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내 살아온 모습이 금이면 금방에 태어날 것이고 무쇠 차원이면 무쇠전으로 가 탄생될 것이고 넝마 같다면 넝마전에 나앉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 출현하는 모습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악업, 선업으로 지은 인연들이 내 속에 모두 주둔해 있다가 기회를 보아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활 잘 쏘는 사람은 궁수가 되고 말 잘 타는 사람은 기수가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고양이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개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돼지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천차만별의 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사람의 의식은 남아 있는데 고양이 모습을 하고 나온다거나 개 모습을 하고 나온다거나 돼지, , 토끼의 모습 등으로 나오는 경우입니다. 그 얼마나 지옥 같겠습니까? 모두 입은 옷대로 대접을 해 줄 겁니다. 독사 소굴에 들어가서 독사가 되었다면 독사의 대접을 해 줄 수밖에는 없지요.

 

고로 우리가 지금 살 때에 어떻게 살아야만 잘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만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이 아니게 중용을 할 수 있으며 걸림 없이 자유롭게 무명無明1)을 벗을 수 있느냐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나도 벗고 상대도 벗겨 줄 수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사람으로 살던 습이 있는데 뱀 소굴로 들어갔다고 하면 그게 바로 뱀지옥이지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땅굴 속에서 살아야 하니 무간지옥이고, 쫓고 쫓기다 칼 맞으니 칼산지옥이요, 탕 그릇에 들어가니 화탕지옥입니다. 그러나 벗어나고 싶어도 먹고 먹히는 마당이라 그 생각에 묶여서 도무지 허물 벗을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단 말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여 오백 생 동안 여우의 탈을 못 면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생각 한 번 잘못에, 말 한마디 그르쳐서 자칫 동물의 틈바구니로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마음 도리를 모르고 죽는다면 너무나 애석한 일이 많습니다. 육신을 벗어 버리고 나면 생전의 식만 남고 눈도 귀도 없으니 볼 수가 있나 들을 수가 있나. 분별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짐승의 굴을 보고도 고대광실인 줄 알고 그 속으로 쑥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 식의 눈, 식의 귀는 생전의 욕심으로 가려져 있으니 뱀 굴을 보고 기와집인 줄 알고, 돌 틈을 보고 돌집인 줄 알아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진화와 창조의 기회를 맞아서

 

우리가 수 억겁 세월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을 때 어떤 모습인들 안 겪어 보았겠습니까? 참으로 눈물겹고 불쌍한 일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겁니다. 그것을 안다면 아마도 너무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눈물겨운 일일랑 계속하지 말고 여기서 아예 차원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저 생물들도 차원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지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인간도 그렇습니다. 어디로 향해 나아갈지를 알지 못한다 해도 지금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부처가 되어 보았으니 지금 사는 게 곧 공부인 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면서도 밑에서부터 예까지 올라왔던 것이지요.

우리가 원점에서 와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고 산다면 또 다른 모습으로 나왔을 때 반복해서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시험에 낙방하고 재도전을 해야 하는 학생처럼 말입니다. 고로 돌고 도는 교차로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뿌리를 깨닫고, 지은 대로 받는 도리를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날 도로아미타불이 되지 말고 말입니다.

 

 

그냥 이렇게 살다 가면 되지 마음공부인지 불법공부인지 그런 공부는 해서 뭘 하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죽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죽으면 그만이라 한다면 모든 게 거기서 끝장을 보았을 테니 이 세상은 계속해서 생겨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생겨났다 해도 생긴 것은 모두 멸하게 되어 있으니 진작에 세상이 끝났을 게 아닙니까?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갔다 나갔다 합니다.

차안此岸, 피안彼岸 하지요? 이 차안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마음을 가지고도 제 마음대로 살지 못합니다. 하고 싶은 말도 맘껏 못하고, 더 살고 싶어도 마음먹은 대로 안 됩니다. 그러니 그런 인생은 감옥에,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니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쌓이면서 도대체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렇기에 마음의 발전을 통해 자유인의 기상을 드날리며 살아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꼭두각시놀음이라지만 층층으로 차원도 많으니 그 차원의 바퀴돌이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록 인간의 몸을 받았다 해도 또한 벗어나야 합니다.

잘못하다가 좌천이 되어 동물의 소굴로 들어섰다 하면 좀 체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왜냐? 한 번 돼지 굴에 들어갔다 하면 돼지 노릇을 해야 하고 돼지로서의 습이 붙기 때문입니다. 좀처럼 한 생각 돌릴 겨를이 없으니 돼지 허물을 벗고 다시 인간의 몸을 받기란 세세생생 돌고 돌아도 기회가 오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은 진화의 이치를 잘 모르고 삽니다. 그냥 살면 그뿐인가 하지만 한 생각이 곧 진화의 힘이 됩니다. ‘다리가 짧아서 이거 안 되겠구나. 좀 길어야 좋겠다.’ 한다면 다음에 나올 때는 다리를 길게 해서 나오거나 다리 긴 짐승의 몸을 하고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벌레가 기어가다가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았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 나도 이렇게 꿈틀거리지 말고 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했습니다. 그 생각이 진화의 힘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었기에 훨훨 나는 날짐승으로 몸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바로 진화입니다. 지렁이가 기어 다니다가 발 달린 놈을 보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면 몸 바꿔서 다리를 달고 나옵니다. 지렁이가 고정관념에 묶여 지렁이인 채로 있으려 했다면 그냥 지렁이로 머물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가 제 모습을 만들어 가지고 삽니다.

 

 

진화와 창조는 다 마음의 나툼2)입니다. 살아가면서 마음먹는 대로 차원을 넘나드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내 육신의 모습과 기능이 좀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면 그런 쪽으로 고쳐 가며 살듯이 세상에 나올 때에 마음의 차원을 따라 모습과 기능을 바꿔 가지고 나오게 되는데 그걸 진화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생각한 것을 설계해서 밖으로 드러내듯이 마음으로 그랬으면하고 설계를 해서 밖으로 내놓으면 그때는 창조입니다. 고로 창조이면서 진화요, 진화이면서 창조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이 모습으로 얼마나 살 수 있다고 마음공부를 게을리 하겠습니까? 한 철에 불과한 이 짧은 기간에 잘 닦아 두어야지 다음 기회에 또 고생할 생각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 마음공부를 해서 해인海印3)을 받고 마음의 열쇠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순간, 다음 생이 확실하게 달라질 게 아닙니까?

 

사람은 정신과 물질이 염주알처럼 꿰어져 있는 것인데 정신계는 외면하고 물질계에만 끄달려서 먹고 사는 일에 연연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옛말에도 있듯이 산 입에 거미줄 치겠습니까? 움직이면 먹고 사는 세상인데 어떡해서든 못 먹고야 살겠습니까?

그보다는 우리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나는 도대체 누구인지, 그것을 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생활이 이만하면 됐다, 나 만큼 잘 하고 사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나름의 차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마음공부를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공부야말로 지금 이 순간의 이 상태, 이 처지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상태, 차원으로 진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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