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부처 될 자격이 있으니
♣ 밝고 청정한 삶을 누리라는 가르침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깨달아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99%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생각이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를 앞세우는 삼독三毒4)의 마음이 꽉 들어찼으니 부처이면서 부처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태어났고 불성佛性을 지녔으므로 본래부터 성불成佛5)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닦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본래부터 부처라서 근본 이치로 보자면 닦을 것도 없지만 그것을 믿지 않고 모르기에 본래의 자부처가 발현되기까지 닦아야 합니다.
나무를 쪼개 보아도 그 속에서 꽃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꽃을 피우는 잠재된 힘은 그 속에 있습니다. 그렇듯이 깨달음에 이르러 성불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인간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면면이 다 부처입니다.
우리들 누구나 본래는 부처인데 태어나길 중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중생으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도 부처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처 생각, 중생 생각이 따로따로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니라 다 한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굴리고 가는 주체는 바로 각자 자신입니다.
우리들이 현실 생활 속에서는 비록 찌들고 지치고 남루하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본래 성품은 밝고 청정합니다. 그 자리엔 ‘괴롭다, 고통스럽다.’ 라는 말이 애초부터 해당되질 않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능력이 모자라고 몸이 부자유스럽고 가진 게 없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자성은 본래 무한한 능력과 힘을 갖고 있습니다. 깊숙이 감춰진 보배처럼 말입니다. 불법은 바로 그것을 발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발견함으로써 밝고 청정한 삶을 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감로의 법인 것입니다.
♣ 이왕 욕심을 부릴 바에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한 것은 스스로 무한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고, 자유자재의 능력이 있다는 것, 모든 재료를 다 갖췄고 여여如如하고 청정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소견을 아주 잘게, 좁게 써서 아웅다웅하며 살고 있으니 당사자로서도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육신이 아니라 정신을 통해 먹히고 먹으며 삽니다. 짐승들은 보이는 데서 서로 잡아먹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서로 정신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그 싸움은 너무나 치열하고 비참해서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싶을 정도입니다.
각자 마음을 너그럽고 자비롭게 쓰며 살아도 먹을 것, 입을 것이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싸우다니 참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부처님 법은 광대무변한 묘법이라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말입니다.
한 생을 길다고 하면 길겠지만 짧디짧은 생을 괴로움 속에서 보내서야 어디 산다고 하겠습니까?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참으로 슬픔도 많고 외로움도 많고 고독함도 많고 험난한 일도 많은데 그것이 다 어디서 오는지를 모른다면 얼마나 딱한 일이겠습니까? 내게 닥치는 일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도 모르고 가는 것조차 모른다면 어디 인간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나 하나 건질 수 없다면 사람이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중생이 사는 모습을 보면 온통 전쟁판입니다. 물질계뿐 아니라 정신계에서도 모두 서로 자기 것이다, 내가 했다 하면서 뺏고 빼앗기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밖으로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과한 탓입니다. 그런데 이왕 욕심을 부릴 바에는 우주 전체를 집어삼킬 욕심을 부리는 게 어떻습니까? 무너져 없어질 것 말고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게 어떻습니까? 소위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나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찮은 욕심 속에서 괴롭게 지내야 하다니 너무 허망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이익을 바라고 복 받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이익이 있는 곳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리고 손해가 날 듯 싶으면 썰물처럼 달아납니다. 그렇지만 중생이 탐하는 이익이란 눈앞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참된 이익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누가 이익을 좇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 승진도 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고……. 그런 것을 하지 말라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집착하지 말라고 할 뿐입니다.
왜냐? 그런 이익은 진정한 이익이 아니며 그 이익의 뒤편에는 그보다 더 큰 고苦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생사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게 가장 큰 불이익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왕 이익을 추구할 바에는 가장 두드러지는 이익, 세속의 욕구에 얽매이지 않고서야 만날 수 있는 이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자유자재의 권리가 있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그건 자유입니다. 그러니 본래 받아 가지고 나온 권리를 행사해야 합니다. 부처님도 사람이었고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니까 여러분도 주어진 권리를 찾아서 부처가 되어 보라는 것입니다.
♣ 나를 건지는 공부
세상에는 하고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고 있는 일도 각각이며 태어난 곳, 자라 온 환경, 학력, 성격, 나이 등도 제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의 생각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불법은 햇빛과 공기처럼 누구에게나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학력이 높든 낮든, 신분이나 부, 권세 따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마치 공기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호흡을 허락하듯 그렇게 평등하게 있습니다. 어느 특정 계층의 차지가 아니라 모든 중생의 차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불법이 어려우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불법에는 단계도 없고 따로 정해진 문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으로써 족합니다. 불법이라는 진리의 바다에 뛰어드는 데는 마음 하나면 족합니다.
세상에 마음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불법을 만날 수 있으며 불법 공부는 따 놓은 당상인 셈입니다. 이 얼마나 반갑고 기쁘고 소중한 소식이겠습니까?
불법 공부는 희생의 공부가 아닙니다. 나의 희생을 요구하는 공부가 아니라 나를 완성시키는 공부입니다. 나를 건지는 공부입니다. 나도 건지고 남도 건지고 일체를 다 살리는 공부입니다. 하늘나라에 태어나기 위해서, 혹은 다음 생에 좀 더 나은 형편이 되기를 원해서, 혹은 축생도에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불법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아예 믿지 않는 게 좋습니다.
불법 공부는 지옥도 축생도 두렵지 않고 천국도 부럽지 않은, 본래부터 맑고 청정한 마음을 드러내는 공부입니다. 불법 공부는 장차 무언가를 얻기 위한, 이루기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불교는 영원한 오늘의 공부입니다. 지금 여기서 삶의 차원을 바꾸고 한 걸음 더 진화의 길로 내딛는 공부입니다.
♣ 배역을 받은 연기자로서
누구나 불성佛性을 지녔으니까 언제 싹이 터도 트겠지요. 그러나 지금 사람으로 태어나서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바로 들어가는 길을, 자기의 근본인 불성을 믿고 거기다가 모든 것을 몰락 놓고 들어가는 길을 한 도반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공에 빠지면 천리만리 길을 그르치고, 현실에 매달리면 아예 더뎌져서 어느 천년에 싹이 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고 생각하고 이 몸이 있을 때에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이 몸이 있음으로써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음으로써 공부가 되는 것이지 몸이 없으면 상대가 없기 때문에 부딪침도 없고 보는 것, 듣는 것도 없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다른 데다 정신 팔지 마시고 내가 이 한 생을 버릴지라도 기필코 이 고해를 벗어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려면 텔레비전이라는 도구가 있어야 하듯이 우리의 육신이 있어야 깨닫든지 부처가 되든지 할 게 아닙니까? 또 허공중에 전파가 꽉 찼다 하더라도 수신기가 있어야 보든지 듣든지 할 게 아닙니까?
그래서 이 육신이 있을 때 공부하라는 것이고, 이 육신이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운밥 찬밥 가리지 말고 육신이 있을 때 무대 위에 올라간 배우처럼 소임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받은 인생 배역에 익숙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 순간의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영화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보세요. 어떤 추잡한 역을 맡더라도 정성을 기울여 열심히 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건 단지 배역이고 촬영이 끝나면 역할도 끝나기 때문이지요.
인생도 그와 같습니다. 누구나 배역을 받아 가지고 나와서 한 철 연기를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잘난 배역이든 못난 배역이든, 가난한 배역이든 부유한 배역이든 역할을 받아서 연기하도록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역이든 정성껏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맡은 역을 지극 정성으로 소화해 내지 않는다면 다음에 그 배우에게 중요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듯이 인생의 배역도 진심을 기울여 해내지 않으면 다음 역할에 기대를 걸기가 어렵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역할을 받은 배우와 같다는 사실을 안다면 각자 삶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선 어떤 역할을 맡든, 임금 역이든 거지 역이든 거부하거나 겁내지 않고 열심히 소화해 내려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 세세생생 거지로 살라는 게 아니라 잠시 잠깐 역할을 하고 끝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역할도 따지고 보면 강제로 맡겨진 게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자동적으로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기에 소임을 다해야만 합니다. 무대에 선 배우가 제 소임을 다하지 않고 불평만 하다가 무대를 내려온다면 다음 배역이 더 보잘것없어지듯 우리의 인생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누구라도 명배우, 주연 배우가 될 자격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배역을 소화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면야 어찌 새로운 배역이 주어지기를 기대할 것이며 명배우로 거듭나기를 바라겠습니까? 우리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끝내 그 길을 찾아내지 못 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 몸 받아 태어났으면 무슨 사연을 갖다 붙이더라도 불법 공부부터 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마리가 풀려도 풀리고 문고리라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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