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행 스님법어

통하는 길은 오직 마음뿐

혜주 慧柱 2016. 2. 24. 07:04

통하는 길은 오직 마음뿐

 

내 마음 안에서 길을 찾아야

 

첫째도 마음, 둘째도 마음입니다. 통하는 길은 마음 밖에 따로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통하는 길은 내면의 한 구멍, 마음뿐입니다. 고로 밖에서 찾지 말고 안으로 마음을 찾아야 합니다.

오직 마음입니다. 삶도 마음, 죽음도 마음, 믿음도 마음……, 시간과 공간도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니 마음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 안으로 돌이키고 마음 안으로 예경禮敬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수행의 길이요, 믿음의 길이요, 참회의 길이요, 회향廻向의 길이요, 진화의 길이요, 열반涅槃의 길입니다. 팔만 사천 법문도 간추리면 마음한 마디로 모아집니다. 그래서 이심전심으로 따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진리는 그런 것입니다. 복잡한 학설이나 이론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거기에 있습니다. 이 마음 하나를 밝히면 이 우주 삼라만상은 다 한 통속이요, 내 주먹 안에 들어옵니다.

 

 

태양의 힘이 아무리 위대하고 우주가 아무리 광대하더라도 조그마한 내 마음만은 못합니다. 내 마음의 빛은 어느 것으로도 가릴 수 없고 내 마음의 힘은 그 무엇으로도 꺾지 못합니다. 신이란 신들이 다 덤벼도, 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다 할지라도 내 마음의 근본은 파괴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물질 따로 마음 따로 라고 생각하는데 물질세계는 마음의 나툼일 뿐입니다.

마음의 손이 제일이고 마음의 불이 제일이고 마음의 향이 제일입니다. 촛불도 마음의 촛불이 가장 밝고 뇌성벽력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바가지는 엎으면 바로 전체를 덮고 젖히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일체의 근본이라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진수성찬이 다 그 안에 있습니다.





멀고 가까운 곳이 없는 마음

 

가 없는 마음인 줄 알면, 막혀서 못 가고 멀어서 못 간다 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한 생각에 벽도 통과, 산도 통과, 강도 통과입니다. 배가 없어서 물을 못 건너고, 타 죽을까 봐 불을 통과하지 못할 게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으로야 건널 것은 어디 있고, 건넌다 못 건넌다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음은 체가 없기에 강이 깊다고 못 갈 일 없고 산이 높다고 못 갈 일이 없고 은산철벽銀山鐵壁6)이라서 못 뚫을 이 없습니다.

발 아닌 발로 뛰고 손 아닌 손으로 뛰어야 합니다. 육신의 발로 뛰어 보았자 한 걸음이 고작이지만 참나는 저 미국도, 저 태양계 은하계도 눈 깜짝할 사이에 건너뛸 수 있습니다. 우주가 한 동네, 아니 내 한 걸음 안에 있습니다. 내 마음의 주인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문지방 너머나 우주나, 멀고 가깝기는 똑같습니다. 빛은 가다가도 중단이 되지만 마음은 빛보다 더 빠를 뿐만 아니라 물 속이든 흙 속이든 높고 낮음이 없이, 가고 옴이 없이 오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이 한 찰나요, 문지방 너머도 한 찰나입니다. 이승과 저승도 한 찰나에 넘나들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바로 죽은 세상 산 세상이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 법은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밖에 나와 계시면서 집에 다녀올 수 있습니다. 내 육신을 움직이지 않아도 눈을 잠깐 감기만 하면 집 안의 구석구석까지 모두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을 아실 겁니다. 그런데 마음의 눈이 떠지지 못하고 마음의 귀가 열리지 못해서 그와 같은 사실에도 불고하고 상세히 볼 수가 없는 거죠.

갔다 온다, 안 온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지금 집에 갔다 온다 하는 것은 내가 갔다고 말할 수고 없고, 왔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냥 한 찰나에 눈 한번 깜짝하니까 알게 되더라 하는 것과 같이 심안心眼7)의 눈이 뜨이면 일체를 우주와 더불어 같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면

 

꽃을 볼 때에도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되지요. 가령 달맞이꽃을 보거든 ! 너는 왜 밤이면 피고 낮에는 오므라드느냐.’ 하고 물어보세요. 반드시 대답이 있을 겁니다. 그 이심전심이라는 것은 비밀의 행이면서도 아주 묘한, 광대무변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이심전심이라는 도리는 자기가 체험하고 자기가 맛봐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천백억화신이 나투면서 각계각층의 중생들을 다 응하십니다. 꽃을 보며 이심전심이 되는 것도 거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작으나 크나 동시에 같습니다. 내가 내 집부터 다스릴 줄 알아야지 내 집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바깥에 나가서 바깥일을 다스리게 됩니까.

저런 산천초목들도 서로 마음과 마음을 통해서 사랑을 하고 열매를 맺고 가을이 오면 주고받는 마음으로 속삭이면서 임을 기다리듯 내년 봄을 기다리며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말을 하게 해 놓았기 때문에 말로써 서로 통하는데, 조금만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사랑이 그만 괴로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권태로 돌아가고 증오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마음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권태가 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미국 사람은 미국말 하고 일본 사람이면 일본말 하고, 한국 사람이면 한국말 하듯이 온갖 중생들도 다 자기네들끼리의 말을 합니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말을 하고 전달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 가운데 특출한 것은 뭐냐? 말없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도리입니다. 이것은 바로 정신계 중용의 진리입니다.

기계 하나를 만들 때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함께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도 생명이 있습니다. 장승을 하나 세워도 장승 세워 놓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또 여러 사람들이 가고 오면서 그것을 보고 생각하는 마음이 그곳에 투영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거기에 이름을 붙여 신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보궁의 열쇠를 얻는 공부

 

중생이 사는 이 세계는 창살 없는 감옥이고 마음 법은 그로부터 벗어나는 공부입니다. 천만 냥을 주고 억만 냥을 주고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게 마음공부입니다. 스님네들이 여러분에게 마음공부 하라고 권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돈이나 받아 잘살고 잘 입고 잘 먹고 이름이나 날리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몸뚱이도 버릴 것인데 무엇을 가져살게 있다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마음공부 하면 현실 생활에서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공부는 무슨 현실의 이익이나 챙기려고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신통력을 얻자고 하는 공부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공부는 고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 통달하는 공부이니 말로 하자면 반쪽 공부가 아니라 온쪽 공부, 100% 공부란 말입니다. 그런 공부를 하다 보면 물리가 터져서 남다른 지혜가 생기고 자재의 권능도 생기긴 합니다만 대자유인은 그런 것을 넘어섭니다.

 

 

자기 집에 보배를 잔뜩 쌓아 놓고 어디 가서 보배를 따로 구하겠습니까? 바로 마음 가운데 불성인 그 뿌리가 보배 창고입니다. 그 점을 안다면, 아니 그 점을 믿는다면 그 뿌리는 내 마음을 통해서 절로 귀띔도 해주고 절로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창고에 보배가 가득한 줄을 내 눈으로 확인하려면 열쇠로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배 창고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열쇠가 어디 있는 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마음공부는 열쇠를 얻기 위한 공부입니다. 누구든지 열쇠고 갖고 있고 곳간도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곳간은 적멸보궁寂滅寶宮8)이요, 칠보七寶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데 왜 열쇠를 갖고도 열지를 못한단 말입니까?

마음이 곧 열쇠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보물을 다 너를 줄 테니 이걸 가지려느냐, 아니면 마음의 보배를 가지려느냐.’ 한다면 어떤 것을 가진다고 하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살면서 부자라고 으스대고 싶다면 아마 세상의 보물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철인 걸요, 한 철. 욕심 많은 사람은 한 철 동안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철 지나고 나면 그냥 다 없어질 것을, 자기 몸뚱이까지도 없어지고 말 것을 왜 그걸 택하겠습니까?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먹을 수 있고, 영원히 줄 수 있고, 영원히 갖출 수 있고,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택하지 왜, 무엇 때문에 한 철 잘 먹고 잘 지내면 그만인 것을 택하겠습니까?

마음은 체가 없어서 시간, 공간에 구애 받지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주의 근본이 되어 일체를 싸고돕니다. 무량한 보배창고와 같고 아무리 퍼내어도 줄지 않는 무한대의 에너지 보고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생각에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고 무엇이로든 나툴 수 있습니다. 마음공부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공부입니다.






기쁨과 평안을 향하여

 

마음공부는 닥치는 일체 경계를 그대로 집어삼키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인생살이가 쓰다고 뱉고 더럽다고 버리고 밉다고 외면하고, 이래서 이것 빼고 저래서 저것 뺀다면 어떻게 다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달다고 삼키고 쓰다고 뱉는다면 하나도 제대로 가직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아이고, 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지 마세요. 될까, 될 수 있을까는 없습니다. 이 공부에서는 그냥 송두리째 먹으려면 먹고 내놓으려면 다 내놓고 이럴 뿐이지 머뭇거릴 이유가 붙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나아가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이지요.

여러분, 누구나 내 집 뜰이 어떻게 생겼고, 가구가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듯이 여러분의 뱃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으며,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으며,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고, 과거에 어떻게 했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바르게 사는 도리를 배우고 깨치느냐에 있습니다.

 

 

마음공부란 좁디좁은 내 마음의 그릇을 넓히는 일입니다. 높이 높이 위로만 오르려는 마음을 아래로 아래로 낮추는 일입니다. 마음의 울타리를 헐고 저 들판처럼 넓고 평평한 마음이 되려는 것입니다.

바다가 모든 강물, 구정물을 받아들이고도 늘 넓고 깊을 수 있듯이 내 마음을 그렇게 닦는 게 마음공부입니다. 마음공부의 길은 기쁨과 행복의 길입니다. 삶 속의 고가 무너지고 번뇌가 녹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닦을 게 있어서 닦는 게 아니라 라는 생각, 이를테면 아만, 아상, 아집 따위의 해묵은 고정관념을 떼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라는 벽을 점차 허물어서 내 안으로 대상을 둘 아니게 안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나의 상대방, 모든 사람, 나아가서는 모든 생명과 둘이 아니게, 그야말로 평등하게 하나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도리가 어렵다고만 하지 마세요. 이 도리를 모르면 우물 안의 이치만 알 뿐, 연못의 이치도 모르고 바다의 이치도 모릅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광대한지도 모릅니다. 부모 없이 사는 아이들을 보세요. 얼마나 가련합니까? 우리도 마음 도리를 모르고 살면 부모 잃은 아이들이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금의 요 모습, 요 차원, 그것은 잠깐입니다. 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자기 인생에 딱지를 붙여 놓았나요? 두고두고 그렇게만 살아야 한다고 정해 놓았습니까? 이 세상에 고정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가난하고 힘겹다 해도 마음 도리를 알아서 공부를 하신다면 그 모습을 바꿔 가지고 나서서 떵떵 울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얼음 녹으면 봄이 오듯이

 

마음공부는 내가 죽는 공부입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마음의 때를 벗겨 내는 것은 라는 상이 죽는 길입니다. 그렇게 죽으면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니 마음공부는 참나를 발견하는 공부입니다.

참나를 발견하고 나면 다시 나와 너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나, 너가 함께 죽는 공부입니다. 그러나 죽는 공부로 그치는 게 아니라 만법이 다시 하나로부터 나투는 도리를 알게 되니 나를 버려 일체를 얻는 공부입니다. 죽으라는 것은 마음으로 죽으라 하는 것이지 몸뚱이를 죽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열 번인들 죽으면 어떻습니까? 몸뚱이는 오히려 건강해지고 오래 삽니다. 병고액난도 녹아 버립니다. 강에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오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죽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치 나인 양, 나의 분신인 양 붙들고 아끼던 고정됨 생각, 고정된 관념이 죽어야 비로소 삶의 판도가 바뀌게 되고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은산철벽을 타파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문 없는 문으로 드나드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이 죽지 않고서는 변화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죽는 것도 한 번이 아니라 죽고 또 죽어야 합니다.

은산철벽을 뚫어라!’ 하는데 바깥 세상의 은산철벽이라면 거대한 터널 뚫듯이 뚫러 보겠지만 이게 마음의 은산철벽이니 도리를 모르면 꼼짝을 못합니다. 아니, 도리를 모른다고 하기 이전에 자기를 바꿀 생각을 않고 이 탓 저 탓, 바깥에서 원인을 찾으려 드니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내 앞의 장애란 실은 철벽이 아니라 백지 한 장입니다. 그러나 백지 한 장이라도 좀처럼 뚫기가 어려우니 은산철벽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과거 의식을 부라 하고 현재 의식을 자라 한다면 마음으로 과거 의식과 현재 의식이 상봉을 해야 하는데 창호지 한 장 사이를 넘지 못해 영영 상봉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들이 창호지 한 장 너머에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기쁨과 행복의 길이지만 얻는 공부가 아니라 다만 닦는 공부인 것입니다.






마음으로써 만 가지 법이 나고 드니

 

마음으로써 만 가지 법을 내놓을 수도 있고 만 가지 법을 들여놓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한 번 나쁘게 쓰면 그로부터 수많은 오염된 싸가 뿌려집니다. 그런가하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에서는 나의 병고病苦도 건지고 남의 병고도 건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근본에 너와 나의 구분은 없습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한 몸이고 한 마음인 까닭입니다. 서로 간에 걸림 없이 통하고 오고 갈 수 있습니다. 고로 내 마음의 근본에서 한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대로 사방으로 통신이 되어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렇기에 닥치는 경계마다 한 생각을 진실하게 돌려놓고 간다면 가령 병이 났다 해도 만물이 다 응해 주어서 병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회사에 직원이 수만 명이라 해도 사장의 한 생각 결정에 모구 따르는 것처럼 마음으로 그렇게 과단성 있게 내놓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결정적인 결재를 한 것이 됩니다.

우리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는 모두 소임이 있어서 들고나는 일에 관여를 하는데 결정적인 결재가 있어야 한가지로 작용을 하지 않습니까? 과단성 있게 믿고 내놓으면, 사장의 결정에 수만 명의 직원이 일사분란하게 따르듯이 이 소우주의 구성적인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도 모두 한 가지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마음의 에너지 통은 하나인데 그것을 끌어다 쓰는 용은 천차만별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요량껏 정도껏 얼마든지 다양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고 듣고 익혀 온 관습 때문에 고정된 생각에 갇혀서는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합니다. 스스로 마음에 병을 일으켜서 이거 큰일 났다고 합니다.

 

 

저수지에 물을 끌어다 쓰는데 딱히 어떤 용도로 쓴다, 누가 쓴다,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농업용으로도 쓰고 공업용으로도 끌어다 쓸 겁니다. 또 생활에 쓴다면 식수로도 쓰고 목욕물로도 화단에 물주는 데도 씁니다.

집집마다 자가발전소가 있어 전력을 뽑아 쓴다면 그때도 쓰임새가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천차만별로 다 쓰는데, 마음 법도 그와 같습니다. 천차만별 무궁무진하게, 크게 쓰려면 크게 쓰고 작게 쓰려면 작게 쓰고 그야말로 쓰기 나름입니다. 마음의 보배 창고는 퍼내도 퍼내도 줄지 않습니다.

밥을 지을 때 어떤 밥을 얼마나 지을까 제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누구나 그런 능력이 있고 그런 에너지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은 지을 줄 알면서도 마음의 활용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마음인 것입니다. 이 마음 깊은 곳에는 힘이라는 모든 힘이 다 깃들어 있습니다. 오신통이다, 무슨 신통력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마음 안에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문제든 마음 안에서 해결해야 하고 또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깊고 신묘합니다. 마음이 보배인 줄을 굳게 믿고 바르게 쓸 때에 그 힘을 느끼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 이 점을 체험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그대로 묘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보배 같은 마음을 바르게 쓰지 않고 독사처럼 쓰는 사람도 있으니 딱한 일입니다. 그 인과응보엔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마음이 밝으면 안으로도 금빛 태양이 찬란히 밝아 빛으로 충만케 되고 아주 원만해지지만 마음이 어두우면 마치 천 년 동굴 속 같아서 어둠을 면치 못하고 여여如如하게 살 길이 막연해집니다. 그러면 내 몸속에서도 간 공장, 위 공장, 폐 공장, 심장 공장이라 할 수 있는 각 장기마다 전기가 끊겨 잘 돌아가질 않고 때로는 파업이 일어나서 전체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지금 가난하다 해서 이다음에 부자로 살지 못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그건 자유입니다. 각자 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 생각을 가난하게 하면 가난해질 것이고 지금 생각을 부자로 한다면 부자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게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받습니다.

지옥도 천당도 다 우리들이 마음먹고 사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다 업식業識9)의 작용이고 이 세상을 고라고 규정하게 되는 것도 업식에 딸린 것입니다. 그러니 사바세계든 지옥이든 천당이든 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땅에도 법망法網10)이 있고 공중에도 법망이 있고, 혹성, 우주에도 법망이 있고 인간에게도 법망이 있습니다. 법망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고 통신이 됩니다. 마음으로 서로 통하고 통신이 됩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과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은 직결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통신이 안 되는 게 없습니다. 또 모든 언행은 우주 법계에 낱낱이 입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다스이면 앉은 자리에서 천당이 되고 잘못 다스리면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내 마음이 아는 것은 부처가 아는 것이고, 부처가 아는 것은 전체가 아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 행동 하나하나, 마음먹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결코 함부로 할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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