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행 스님법어

2장 마음의 양면성

혜주 慧柱 2022. 3. 3. 20:16

顯示正義者 依一心法有二種門 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 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 此義云何 以是二門不相離故

대승불교가 긍극적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마음의 본질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현상적 측면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정신적 개념들은 모두 본질과 현상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본질과 현상으로 나누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념적인 구분일 뿐이다. 둘은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특성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특성이다.

 

설명

예를 들면 나무로 만든 의자와 책상, 책꽂이, 침대는 이름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그 쓰임도 다르다. 그와 같이 똑같은 나무가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이름과 모양과 용도의 차이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현상적 측면이다.

반면에 다양하게 드러난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나무라고 하는 공통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 나무의 모양과 이름, 쓰임이 달아졌다고 해서 나무라는 재질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불변이다. 이것이 본질적 측면이다.

그런데 책상은 때로 식탁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의자가 자시 옷을 걸쳐놓는 옷걸이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고정된 불변의 성질이 아니다. 항상 상황에 따라서 없던 책상이 생겨나기도 하고 있던 책상이 식탁이 되면서 있던 것이 없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현상적 속성은 항상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생멸한다. 여기서 나무는 마음의 본질, 즉 진여심에 해당하고 나무로 인해서 만들어진 의자, 책상, 책꽂이 등 다양한 모양들은 마음의 현상, 즉 생멸심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무책상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나무라는 본질과 책상이라는 현상은 어디까지나 개념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나무와 책상을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으로 본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무로 책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무와 책상이 같은 것은 아니다. 나무가 책상은 아니고 책상이 바로 나무는 아니다.

마음의 본질과 현상의 관계도 바로 이와 같다.

 

진여심

 

1, 진여의 특징

 

心眞如者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 所謂心性不生不滅

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心念 則無一切境界之相

是故一切法從本已來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 畢竟平等 無有燮異

不可破壞 唯是一心故名眞如 以一切言說 假名無實 但隨妄念 不可得故

言眞如者亦無有相 謂言說之極 因言遺言 此眞如體無有可遺

以一切法悉皆眞故 亦無可立 以一切法皆同如故 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

故名爲眞如

마음의 본질, 즉 진여는 다양하게 드러나는 마음의 현상들을 모두 하나로 연결하는 본체다. 그리고 마음은 근본적으로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질적 측면은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서 변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본래 모습은 불생불멸이고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의 마음이 항상 좋아하고 싫어하면서 차별하고 평등하지 않다. 이유는 마음이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그릇된 생각과 관념, 편견에 의한 주관적 해석에 의해서 각기 다른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러한 그릇된 관념과 편견을 버리면 각기 다르게 보이는 모든 현상은 본질적으로 독립적인 다른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현상들을 말과 언어로 차별적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이름이 다르다고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이름은 인위적으로 붙인 꼬리표에 불과한 관념이고 개념적인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일체 현상은 본질적으로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며 변화하거나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절대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며 불생불멸하는 마음의 본질을 진여(참으로 그러하다. 있는 그대로 라는 의미)라고 부른다. 말로써 설명되어지는 것, 즉 개념이나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이름만 있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그릇된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진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여라고 이름붙인 것도 역시 개념일 뿐이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진여를 말로써 설명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여라는 말을 빌려서 다른 모든 그릇된 관념과 개념을 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진여라는 말을 수단으로 모든 그릇된 말이나 관념, 개념을 버림으로써 진여 자체에는 더 이상 버릴 것도 보탤 것도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진실만이 남는다. 또한 주장할 만한 것도 없는데, 이는 일체 현상이 모두 차별 없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여는 마음의 본질을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참으로 그러하다.’는 의미의 진여라는 이름을 봍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설명

우리가 이 우주의 모든 정신적 · 물질적 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진짜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인 실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는 깨끗하고 순수했던 마음이 오감의 작용과 정서, 사고, 기억과정을 거치면서 그릇된 편견과 착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정보들은 관념이나 생각이 만들어낸 심상이다. 아니면 눈 · · · ·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양이나 색깔, 소리, 냄새, , 촉감을 각자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 편견으로 나름대로 분석하고 해석해서 받아들인 표상이다.

심상은 허상이다. 심상은 관념적 · 인식적으로만 존재하는 생각의 이미지 또는 모양이기 때문에, 마음 안에서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 마음 바깥의 외부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상은 생각이 만들어 낸 환영에 불과하다. 한편 표상도 허상이다. 그러나 표상은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의 이미지이고 겉모습이다.

, 우리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사물의 모습이 감각기관을 거치는 동안 잘못 해석되고 왜곡된다. 왜냐하면 각자의 생각과 감정과 경험, 기억 등의 외계의 사물을 보는 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맑은 거울에 먼지와 때가 끼어서 사물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의 때로 인해서 실상이 왜곡된 표상으로만 지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주의 진실된 모습(실상 또는 진여)은 마음의 때를 완전하게 벗어버린 부처님의 경지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처나 신은 심상이다.(석가모니 부처님은 심상이 아니라 표상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음으로만 존재하는 인식론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각기 왜곡되게 받아들여서 해석하고 개념을 붙이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념과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실제로 공간과 부피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이나 부처를 마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만 존재하지, 신이나 부처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화려한 장미와 수수한 백합은 표상이다. 장미와 백합은 부처나 신과는 달리 마음 밖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자미 자체가 화려하고 백합 자체가 수수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식과 관념이 그렇게 보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미와 백합은 마음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으로 인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상관없이 장미와 백합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반면에 신과 부처는 믿고 인정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주관적으로 존재할 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지옥과 극락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은 바로 존재의 실상과 허상을 깨닫는 것이다. 또 심상과 표상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그 본질과 작용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2, 진여를 깨닫는 방법

 

問曰 若如是義者 諸衆生等 云何隨順而能得入 答曰 若知一切法雖說

無有能說可說 雖念亦無能念可念 是名隨順 若離於念 名爲得入

앞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현상은 허상이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심상이고 표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 또는 진여의 모습을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깨달을 수 있는가?

중생은 일체의 정신적 · 물질적 현상을 관념적으로 설명하거나 개념적으로 정의를 내려놓고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집착한다. 그런데 만약 말로써 설명되는 모든 현상들은 실제로는 설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설명할 만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또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만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그것이 바로 진여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릇된 관념이나 주의주장을 버리면 무념無念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관념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심상도 자연히 소멸되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고 존재의 실상인 진여를 깨닫게 된다.

 

설명

우리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과 갈등의 원인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생각, 주의주장, 이념, 관념으로 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그런데 생각이나 관념의 특징은 생각의 모양, 즉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바로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 낸 모양, 이미지가 심상이다. 그리고는 생각기 만들어 낸 심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집착한다. 또 잘못된 생각과 관념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왜곡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것이 표상이다.

더욱 위험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나 관념은 집단적으로 심상을 만들어서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정의함으로써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念念相續 이어지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심상은 좀처럼 소멸하기 힘든 단단한 형태로 굳어져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예를 들면 부처, , 알라 등이 가장 대표적인 심상에 해당한다. 즉 사람들은 생각이 만들어 낸 심상에 부처, , 알라 등의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고 집착하면서,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생각의 차이로 싸우고 갈등하고 미워하게 된다. 또 극락이나 천국도 말로써 설명되는 관념이고 심상의 차이일 뿐이다. 모두가 마음 바깥에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뿐이다. 이는 신과 알라는 다른 별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생각과 관념이 신과 알라의 차이만큼이나 멀고 다르다는 현상을 신과 알라라는 이름을 빌려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과 알라가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관념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가르침은 바로 인간은 서로 다른 생각과 관념에 각기 다른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 그 이름과 의미에 부합하는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 즉 마음의 형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만들어낸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에 다시 생각과 관념을 불어넣으면서 체계와 논리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마음이 창조해낸 심상을 진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 자기들만이 믿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안은 자연히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다른 사람도 같이 믿음으로써 더 안심하고 편안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정당화하고 확고하게 하려는 시도에서 믿음의 논리와 체계를 발전시킨다. 심상을 중심으로 이익 손해를 계산하면서 포섭하고 뭉친다. 또 약하면 숙이면서 세를 확장하고, 강하면 배척하고 공격하면서 세를 확장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과 싸움,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위의 가르침은 바로 인간의 관념과 생각이 만들어낸 심상들로 말미암아 비롯된 수많은 인간 고통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든 신이든 알라든 모두가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낸 심상, 마음의 모양이라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상은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생각의 이미지요, 관념의 모양이지 정말로 마음 밖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과 심상에 집착해서 부처 또는 신, 알라 등의 서로 다른 이름표를 붙이고 사랑과 자비 대신 미움과 분노를 갖지 말라는 것이다.

 

 

3, 진여의 두 가지 의미

 

(1) ()과 불공(不空)

復次此眞如者 依言說分別 有二種義 云何爲二 一者如實空

以能究竟顯實故 二者如實不空 以有自體具足無漏性功德故

참으로 그러하다또는 진실로 있는 그대로다는 의리를 가지고 있는 진여를 말로써 설명해 보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다. 이는 진실로 비어 있다라는 의미다. 앞에서 모든 심상은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모든 표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생각과 관념의 직접 또는 간접적 영향으로 왜곡되어 드러난다. 그러므로 심상과 표상은 허상이기 때문에 심상과 표상의 진짜 본 모습은 허공처럼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일체 현상들의 궁극적 모습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다. 이는 진실로 비어있지 않다라는 의미다. 첫 번째에서 심상과 표상이 비어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심상과 표상이 무념무상이 되었다는 의미다. , 생각과 관념이 비어버리면 생가과 관념으로 가득 찬 심상도 텅 비게 된다. 생각이나 관념의 차이, 심상의 차이로 부딪히고 갈등하는 모든 관계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 주관적인 생각이나 관념이 사라지면 사물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각자가 고집라고 집착하는 생각과 관념이 텅 비고 생가과 관념으로 인해서 발생했던 심상과 표상도 텅 비어지게 되면 자연히 생각의 차이로 비롯된 모든 갈등과 인간 고통도 사리지게 된다. 따라서 생각과 관념이 텅 빈 마음은 자리이타를 실현할 수 있는 모든 잠재적 성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진여 자체가 번뇌가 없는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

첫 번째는 심상과 표상이 본질적으로 허상이기 때문에, 진짜가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선언한 것이다. 두 번째는 그러한 진실을 알게 되면, 서로 다른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낸 허상을 진짜라고 굳게 믿고 집착해서 싸우고 갈등하고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믿음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불이익을 주는 행위가 사라지게 된다. , 종교, 지역, 학벌, 남녀 등 각종의 차별적인 생각과 관념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러한 차별적인 생각과 관념이 사라지면 마음은 텅 비게 된다. 그리고 그 텅 빈 마음의 상태레서는 자식돠 타인을 이롭게 하는 무수한 선행을 행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실제로는 비어있으면서 미묘하게도 비어있지 않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신, 알라, 부처는 심상이라고 했다. 심상은 우리가 실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생각과 관념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다. 그러므로 신, 알라, 부처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그 이름에 부여한 온갖 의미들과 정의, 개념들로 가득 차 있다. , 신은 이러저러하고 알라는 어떻고 부처는 어떻고 등, 우리가 일상에서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존재론적 실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말이나 개념정의가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주장하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나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식론적인 존재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은 온통 이런 것이고 저런 것이라고 개념적으로 정의가 필요하다.

위에서 여실공이라고 하는 의미는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의 실체는 이름뿐이지 실체는 텅 빈 허상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모두가 우리의 생각과 개념, 관념이 만들어내고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고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마음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여실불공은 비어있지 않다는 의미다. 즉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이 이름만 있고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있는 실상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사랑과 진실을 말로 하지 않고 관념과 생각을 버리고 행동으로 실천하면 신, 알라, 부처 등은 실제로 무한한 사랑과 진실, 자비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빈 깡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2) ()의 의미

所言空者 從本已來一切染法不相應故 謂離一切法差別之相 以無處妄心念故

當知眞如自性 非有相 非無相 非非有相 非非無相 非有無俱相 非一相

非異相 非非一相 非非異相 非一異俱相 乃至總說 依一切衆生 以有妄心

念念分別 皆不相應 故說爲空 若離妄心 實無可空故

비어있다는 말은 관념과 개념에 이름을 붙이고 인위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신, 알라, 부처와 같은 모든 심상이 실상이 아닌 허상이라는 의미다. 즉 신, 알라, 부처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 알라, 부처를 생각하는 인간의 생각이 차이를 두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체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또 있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없지 않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신, 알라, 부처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같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며, 같으면서 동시에 다른 것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중생들이 그릇된 마음으로 서로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어 차별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름이 다르고 그 이름에 붙여진 의미와 관념이 다르다고 해서 실제로 신, 알라, 부처에 해당하는 실존적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 알라, 부처 등의 심상은 그 본질이 공(, 비어있다)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심상의 본질이 다르다는 그릇된 인식과 관념을 버리면 굳이 신, 알라, 부처가 공하다는 말조차 필요하지 않다.

 

(3) 불공(不空)의 의미

所言不空者 已顯法體空無妄故 卽是眞心 常恒不變 淨法滿足 則名不空

亦無有相可取 以離念境界 唯證相應故

한편 비어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현상의 본질이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거기에는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없다. 그렇게 때문에 본질 자체는 참되고 항상 변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은 깨끗함과 맑음으로 가득하다. 마음의 때는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다. 참되고 깨끗하다는 의미는 그릇된 관념과 생각이 텅 빈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특성을 지닌 구체적인 뭔가를 관념적으로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차별적으로 그릇된 생각과 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경지는 설명하고 개념적으로 정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체험적으로 깨달아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

앞에서 신이나 보살, 부처는 심상이라고 했다. 이들은 생각과 관념, 즉 마음이 만들어낸 이미지요,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중생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중생의 마음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이나 부처는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다. 이와 같이 신이나 부처는 실제로 존재하는 실상이 아니라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낸 심상이고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 바로 깨달은 그 마음이 진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깨달은 마음은 불생불멸하고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면 우리는 그 깨달은 마음이 뭔지에 대해서 어떻게든지 설명하고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생각과 관념이 제거된 마음의 상태는 인식주관과 인식객관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말로써 설명될 수 없다 오직 실제 깨달음으로써 체험되고 얻어져야만 된다.

 

. 생멸심

 

1, 마음이 생멸하는 원인

 

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 與生滅和合 非一非異

名爲阿黎耶識

마음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이유는 여래장 때문이다. 여래장은 불생불멸하는 마음의 본질과 생멸하는 마음의 현상이 서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상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본래 마음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불생불멸하는 마음의 본질이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생멸하는 현상적 마음과 화합되어 서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양면성을 갖게 되었다. 그와 같은 마음의 양면성을 저장식산스크리트어로 아뢰야식을 말한다. 이라고 한다.

 

설명

마음은 원래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 불생불멸이다. 그런데 시시때때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중생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수히 착각하고 오해해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생겨나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진짜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맑고 고요한데 그 마음 안에서 우리들의 감각, 정서, 생각, 기억의 파도들이 수시로 생멸하면서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어지럽힌다. 또 온갖 그릇된 생각과 관념들을 만들어서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없애기도 한다. 이를테면 신, 알라, 부처를 만들어 내고 더럽고 깨끗하고 좋고 싫고 성스럽고 천하고 등의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한다.

 

2, 저장식의 작용

 

此識有二種義 能攝一切法 生一切法 云何爲二 一者覺義 二者不覺義

저장식은 모든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의 동일한 본질로 포섭하기도 하고 반대로 하나의 동일한 본질에서 모든 다양한 현상들을 드러나게 만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저장식은 동일한 본질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현상들로 드러나기도 하고 반대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드러나는 현상들이 하나의 본질로 통합되기도 한다. 그와 같이 하나의 본질이 서로 다른 현상으로 드러나거나 서로 다른 현상이 하나의 본질로 통합되는 방식에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두 가지가 있다.

 

설명

우리가 시시때때로 불러일으키는 감각, 감정, 생각, 관념, 개념 등은 우리의 의식수준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들은 모두 무의식의 깊은 심층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고 행하는 일체의 것들을 기억하도 저장하는 기억창고를 저장식이라고 부른다.

그 속에는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익혀온 생의 습관, 기억, 경험의 종자들이 들어 있다. 저장식은 우리가 살아서 행하는 모든 경험, 기억, 습관 등을 종자로 저장하는 작용과 동시에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저장된 과거의 경험과 습관, 기억의 종자들을 싹 틔우고 생겨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저장식이 일체의 업을 저장하고 또 저장된 업을 상황에 따라서 드러내는 작용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깨달음의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깨닫지 못함의 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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