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깨달음
1, 깨달음이란
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 等虛空界 無所不徧 法界一相 卽是 如來平等法身 依此法身說名本覺 何以故 本覺義者 對始覺義說 以始覺者 卽同本覺 始覺義者 依本覺故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
깨달음은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의 본체를 말한다.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은 허공처럼 온 우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우주와 한몸이다. 깨달은 마음은 바로 여래의 절대 평등한 진리의 몸이다. 또 그와 같은 진리의 몸을 본각이라고 한다. 본각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경험적 깨달음[始覺]과는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은 얻은 경험적인 깨달음과 수행 이전에 본래부터 깨달아 있는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깨달음은 질적으로 동일하다. 왜냐하면 수행을 통해서 깨닫고자 하는 깨달음이 바로 본각이기 때문이다. 또 본각이 있기 때문에 불각不覺이라는 말도 상대적으로 성립된다. 다시 불각이 있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가는 시각도 있을 수가 있다.
【설명】
깨달음의 상태, 또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깨달음의 상태는 모든 차별과 우열, 성스러움과 속됨을 구분 짓는 관념, 개념, 편견이 사라져서 허공처럼 텅 비어버린 마음 상태다. 그래서 자신과 타인을 구분 짓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완전하게 동일하고 절대평등하다. 또 ‘신은 성스럽고 인간은 속되다.’는 관념이나 ‘남녀가 다르고 인종과 빈부에 따라서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그릇된 편견과 관념이 완전하게 사라진 상태다.
그래서 깨달은 마음은 종교, 인종, 성별, 관념, 주의 등으로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고 인간과 자연을 갈라놓는 벽을 허물어버린다. 그 결과 깨달은 마음은 온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본각의 의미는 모든 중생은 부처의 종자를 가지고 있으며 본래부터 이미 부처였으며 깨달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중생이 관념과 개념 속에 갇혀서 자기가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즉 신, 알라, 부처, 보수, 진보, 남녀, 인종, 빈부 등의 그릇된 관념과 개념의 벽에 막혀서 다 같이 똑같은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또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돌을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고 모래로 밥을 짓는다고 모래가 밥이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미 깨달음 마음이[本覺] 우리 안에 없다면 아무리 수행을 한다고 해도 깨달을 수는[始覺]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부처가 아니라면 수행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는 없다. 또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은 상대의존적인 말이다. 음지와 양지의 관계처럼 각覺과 불각不覺도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종합적으로 설명하면 본래 깨달은 마음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것을 본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분별하고 차별하는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깨달은 마음을 덮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볼 수가 없고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불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각을 가리고 있는 잘못된 생각과 관념, 편견, 개념들을 부수고 제거하여 맑고 깨끗한 본각이 드러나고 작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을 통해서 무지를 제거하고 마침내 본래 깨달은 마음을 발견하고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시각이다.
2, 깨달음의 수준
又以覺心源故 名究竟覺 不覺心源故 非究竟覺
깨달음에는 마음의 근원을 깨달음으로써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궁극적인 완전한 깨달음이 있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단계에서 얻어지는 부분적인 깨달음 또는 불완전한 깨달음이 있다.
【설명】
여기서는 중생의 깨달음을 부처의 경지에 이른 완전한 깨달음과 부분적으로 깨달은 불완전한 깨달음으로 구분하고 있다. 가끔 학자들 사이에 돈오頓悟와 돈수頓修를 논쟁한다. 또 깨닫고 나서도 계속해서 닦아야 하는지 아니면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는지를 논쟁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진여는 말이나 개념으로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 자체가 관념과 개념이 텅 빈 것이어서 말과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면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인지 불완전한 깨달음인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는지, 정말로 부처가 되었는지는 누가 판단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할지 모른다. 그런 문제되지 않는다. 부처는 인가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가경에 행위는 있어도 행위자는 없다는 가르침이 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깨달음의 행은 있어도 깨달은 자는 없다는 말이 된다. 즉 깨달음은 중생의 이익과 기쁨을 위해서 보현행으로 드러나는 생이 있을 뿐, 깨달음을 얻은 존재 자체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무익하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미 깨달은 부처들이기 때문에 새삼 깨달았는지 아닌지를 따질 필요도 없고 더 닦아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를 논쟁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수행의 결과로 드러나는 생이 얼마나 우주와 한마음이 되고 중생의 깨달음을 돕는지 그것을 논쟁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다음은 불완전한 깨달음의 정도를 4가지 수준에서 설명하고 있다.
⑴ 인과因果에 대한 깨달음
此義云何 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故 能止後念令其不起 踓復名覺 卽是不覺故
이를테면 일반 중생의 수준에서, 이전에 품었던 생각이 뒤에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자. 이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알고 원치 않는 악의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악의 원인을 억제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아직 마음의 근원을 파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인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다.
【설명】
이는 감각식 수준에서 멸상을 깨달은 상태다. 멸상은 신구의 삼업으로 인한 살생, 도둑질, 불륜, 거짓말, 이중적으로 꾸며서 하는 말, 남을 성나게 하고 악담하는 말, 이간질하는 것을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행위가 자신과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⑵ 본질과 현상의 차이에 대한 깨달음52단계의 보살수행에서 11단계에 해당
如二乘觀智 初發意普薩等 覺於念異念無異相 以捨麤分別執著相故 名相似覺
본질과 현상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본질적 차이와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 차이를 아는 지혜-아집을 버림 모든 현상적 차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양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단계다.법집을 버림 이 수준에 있는 수행자는 현상이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 관념, 개념이 차별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차별적인 생각, 관념, 개념에서 벗어난다. 이 단계에서는 모양과 이름에 따라서 분별하고 차별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깨달음은 깨달음이지만, 아직 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깨달음과 유사한 피상적인 깨달음[相似覺]이다.
【설명】
의식 수준에서의 깨달음이다. 예를 들면 의식 수준에서는 신, 알라, 부처 등 서로 다른 관념적 이미지나 모양, 이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 관념, 개념의 차이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신, 알라, 부처와 같은 심상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여전히 무의식 수준에서는 그러한 관념적 이미지를 고집하고 집착한다. 다시 말해서 의식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 알아차림이 있지만 무의식 수준에서는 여전히 부처, 신, 알라 등의 이름과 관념적 이미지에 따라서 분별 망상하는 습관과 기억이 작용한다. 그 결과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교만, 의심, 그릇된 견해 등을 가지고 있다.
⑶ 현상의 동질성에 대한 깨달음52단계의 보살수행에서 41~50단계에 해당
如法新菩薩等 覺於念住 念無住相 以離分別麤念相故 名隨分覺
관념과 개념, 생각의 차이가 각기 다른 심상과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은 단계다. 그래서 이름이나 모양의 차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다양한 현상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여전히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완전하게 깨닫지는 못했다.
【설명】
마나식 수준에서의 깨달음이다. 예를 들면 부처, 신, 알라 등의 서로 다른 심상과 이름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과 생각, 개념이 만들어낸 인식론적 존재이며 허상이라는 사실을 의식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깨달은 단계다. 그 결과 자기 존재가 특별하고 자기 종교, 민족, 능력 등이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편견과 아만에서 벗어나 있다. 무의식 수준에서도 관념적 이미지와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나와 너의 다양한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절대동등하고 평등하다는 사실을 의식 · 무의식의 수준에서 깨달은 상태다.
⑷ 본질과 현상의 동질성과 차이에 대한 깨달음보살수행에서 50단계를 완성한 등각(부처의 경지와 거의 같은 깨달음의 경지), 묘각(바르고 원만한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
如菩薩地盡滿足方便 一念相應覺心初起 心無初相 以遠離微細念故 得見心性
心卽常住 名究竟覺 是故脩多羅說 若有衆生能觀無念者 則爲向佛智故
저장식 수준에서의 깨달음이다.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모양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파악한다. 또 ‘나’와 ‘너’에 대한 온갖 개념과 관념, 편견이 사라져서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현상을 차별이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대한다. 관념과 편견이 없는 무념으로 반응함으로써 최초의 근본 무명이 사라지고 본래 깨달은 마음에 한 생각이 최초로 일어나는 모양이 공함을 깨달았다.
이는 무의식의 가장 심층에 자리 잡고 아주 미세하게 작용하는 최초의 그릇된 망념을 벗어난 것이다. 비로소 불생불멸하는 마음의 본질을 보게 되니 이를 궁극적인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전에서 만일 중생이 무념을 볼 수 있으면 바로 부처님의 지혜로 향한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부처님은 세세생생부터 쌓아온 일체의 관념이 사라진 상태지만 중생은 현생의 일부를 깨달았을 뿐, 아직 과거 생에 쌓은 다른 많은 관념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제거하고 소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설명】
여기서는 마음의 본질과 그 본질이 작용하는 현상이 관계를 선명하게 깨달은 단계다. 예를 들면 부처, 신, 알라 등의 심상에 담겨진 각기 다른 이름, 의미, 관념 등이 사라져서 허공처럼 텅 비어 버린 실체를 봤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념과 생각이 사라짐으로써 마음의 벽이 허물어져서 부처, 신, 알라 등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한다. 또 처음 알라, 부처, 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게 된 동기와 무의식적인 탐욕, 야망, 무지를 깨달았다.
즉 외로워서, 괴로워서, 권력을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소원을 위해서, 두려워서 등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신, 알라, 부처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편견과 갈등, 미움에서 벗어난다. 만일 부처, 알라, 신 등의 이름과 심상이 모두 다 관념의 차이, 생각의 차이임을 보고 그러한 관념과 생각을 버리고 생각 없이 관념 없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의 지혜인 것이다.
⑸ 완전한 깨달음
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 卽謂無念 是故一切衆生不名爲覺
以從本來念念相續 未曾離念 故說無始無明 若得無念者 則知心相生住異滅
以無念等故 而實無有始覺之異 以四相俱時而有 皆無自立本來平等 同一覺故
또 마음이 최초로 일어난다는 말을 했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최초의 모습이란 없다. 그런데도 최초의 모습을 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최초에는 무념이었음을 아는 사실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체 중생은 무념상태가 아니라 항상 생각이 있으므로 깨달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중생은 원래부터 생각 생각에 연속적으로 이어져서 지금껏 그렇게 연속되는 망념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을 무시무명(시작을 알 수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무념의 상태가 되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 즉 심상이 생겨나서 머무르고 변해가고 소멸되는 4가지 현상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심상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바로 무념이기 때문이다.무념무상(無念無相), 즉 생각이 없으면 생각의 그림자인 심상도 사라지기 때문에 생각이 없는 무념의 상태는 자연히 무상의 상태이기도 하다. 또 심상의 생주이멸이 망념 속에서만 존재하고 무념이 되면 없어지기 때문에 심상은 망념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따라서 망념이 없어지면 심상의 생주이멸도 원래 없는 것이므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시각이 본래부터 깨달아 있었던 본각과 똑같은 깨달음의 상태가 된다.
【설명】
최초의 마음은 관념, 편견, 그릇된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의 생태다. 그런데 무념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 수많은 삶을 윤회하면서 그릇된 관념, 개념, 생각으로 오염되었다. 관념, 개념, 생각은 다시 심상의 생주이멸을 만들면서 심상에 집착되고 고착되어 번뇌와 망상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수행을 통해서 모든 관념과 편견, 생각을 버리면 관념과 생각으로 만들어진 심상도 함께 소멸된다. 심상의 생주이멸이 사라진 상태, 그것이 바로 무념의 경지다.
이때 수행으로 얻어진 깨달음은 본각과 동일한 깨달음의 경지가 된다.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완전한 깨달음이란 바로 일체의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무지에 가려진 본각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수행을 통해서 얻은 시각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무지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본각을 발견하고 깨달은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각과 시각이 일치한다고 하는 것이다.
3. 무지와 함께 작용하는 선천적인 깨달음
復次本覺隨染分別 生二種相 與彼本覺不相捨離 云何爲二
一者智淨相 二者不思議業相
본각은 그릇된 관념과 무지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다음 두 가지 특징을 드러낸다. 하나는 순수한 지혜의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사의한 업의 작용이다. 수염본각隨染本覺을 말한다. 이는 선천적으로 깨달아 있는 마음이 무명으로 오염되어 무명과 깨달음이 혼합되어 있는 상태다.물론 이 두 작용은 본각과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설명】
선천적인 깨달음은 그릇된 관념과 무지에 물들어진 상태에서도 그 본질을 상실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정제되지 않은 금광석이나 때가 낀 거울과 같은 상태다. 금광석 속에는 금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광석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속에는 순금이 들어 있고, 그 금은 다른 이물질인 광석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순수한 금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때가 낀 거울 역시 비록 때로 뒤덮여 있으나 거울의 본래 속성은 때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다가 광석의 이물질이 제거되면 언제든지 그 본연의 빛을 발하고, 또 거울의 때가 벗겨지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작용을 한다. 마찬가지로 무지에 가려진 본각 역시 맑고 순수한 지혜의 상태로 유지되고, 무지가 제거되면 무수한 지혜의 작용을 드러낸다.
⑴ 무지에 물들지 않는다.지정상(智淨相)이라고 한다. 이는 선천적인 깨달음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속성을 말한다.
智淨相者 謂依法力熏習 如實修行 滿足方便故 破和合識相 滅相續心相
顯現法身 智淳淨故 此義云何 以一切心識之相 皆是無明 無明之相 不離覺性
非可壞 非不可壞 如大海水 因風波動 水相風相不相捨離 而水非動性
若風止滅 動相則滅 濕性不壞故 如是衆生自性淸淨心 因無明風動
心與無明俱無形相 不相捨離 而心非動性 若無明滅 相續則滅 智性不壞故
순수한 지혜는 원래 중생의 내면에 있는 진여를 닦고 익힌 힘으로 마음의 때를 벗겨낸다. 그리하여 지혜와 어리석음이 화합되어 있는 깊은 무의식의 심층에 누적되고 저장되어 있는 과거 경험과 기억, 관념, 습관 등을 깨트린다. 그 결과 관념과 생각이 만들어낸 심상과 이미지가 과거 현재 미래로 생멸하면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무의식을 소멸시키고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 드러나도록 한다. 즉, 그릇된 관념과 생각을 버림으로써 청정하고 고요한 지혜의 마음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중생이 그릇된 관념과 생각을 가지고 느끼고 판단하고 기억하기 때문에 그 작용이 모두 무지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의 작용은 선천적인 깨달음과 함께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파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바람에 의해서 파도가 움직이는 큰 바닷물과도 같은 이치다. 물의 속성이나 바람의 속성은 버리거나 떠나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바닷물이 바람에 의해서 파도가 일어날 때 움직이는 파도는 물의 속성과 바람의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서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바람이 멈춰서 잦아들면 물은 자연히 움직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도 물의 젖는 습한 성질은 파괴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람이 그쳐서 없어지면 움직이는 파도의 모양은 곧바로 사라지지만 물의 젖는 습한 성질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중생의 선천적인 깨달음이 무지의 바람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러나 무지의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버리고 떠나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무지가 소멸되면 무지로 인해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던 그릇된 관념과 망상이 만들어 내는 심상도 저절로 소멸된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속성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다.
【설명】
위의 이야기는 무지와 선천적 깨달음이 혼합되어 있지만 선천적 깨달음의 지혜는 무지에 의해서 물들거나 오염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무지가 제거되는 순간에 선천적 깨달음의 지혜는 맑고 깨끗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의 지혜가 무지에 가려서 없거나 불분명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이는 마치 맑고 깨끗한 거울에 때가 껴서 옷의 색깔이 제대로 보이지 않거나 자기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더럽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무지에 가려서 맑고 깨끗한 자기 모습이 못나고 어리석게 보인다. 그래서 무지에 비추어진 자기 모습을 혐오하고 싫어한다. 어떤 이는 싫은 자기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오히려 잘난 척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를 미워하고 열등감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안에 처음부터 맑고 깨끗한 지혜가 있지만 무지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먼지 낀 거울에 비추어진 옷이 보기 싫다고 거울을 닦아서 먼지를 없애는 대신에 옷을 버리는 것과도 같다. 또 먼지 때문에 자기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더럽게 보이는 줄을 모르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더러워하고 싫어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고 미움이 일어나고 질투심과 탐욕이 일어나는 것도 무지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와 미움, 질투, 탐욕을 버리거나 파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분노, 탐욕, 미움, 질투 등의 마음 작용은 마치 바람에 의해서 일어난 파도와 같기 때문이다. 즉 파도가 물과 바람이 함께 혼합되어 일어나듯이 분노나 미움, 탐욕도 지혜와 무지가 함께 혼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욕이나 분노 자체를 버리거나 파괴할 수는 없다. 이들은 처음부터 버리거나 파괴할 어떤 특징이나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지혜가 마음에 탐욕과 분노의 파도를 일으킨 무지의 바람이 멈추면 탐욕과 분노의 파도는 자연히 소멸되고 만다.
우리는 흔히 욕심을 버리고 분노나 미움을 없앤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욕심을 버리거나 파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분노나 미움도 마찬가지다. 욕심과 분노의 뿌리가 무지이기 때문에 무지가 소멸되지 않는 한 욕심이나 분노도 소멸될 수 없다. 이를테면 파도를 잠재우려면 바람이 멈추어야지, 바람은 그냥 두고 파도를 없애려는 일은 불가능한 이치와 동일하다. 그런데 무지의 대표가 그릇된 관념과 생각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릇된 관념과 생각이 소멸되어야 한다.
⑵ 불가사의한 작용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不思議業相者 以依智淨 能作一切勝妙境界 所謂無量功德之相
常無斷絶 隨衆生根 自然相應 種種而現 得利益故
불가사의한 작용이라는 것은 선천적 깨달음의 지혜가 무지로 인한 아집의 장애와 탐진치 삼독을 벗어나서, 중생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서 상황과 조건에 맞는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내어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한다는 것이다.
【설명】
앞에서 고요한 바닷물에 바람이 불어서 파도를 일으키듯이 맑고 평화로운 마음에 무지의 바람이 불어서 분노, 미움, 질투, 탐욕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그런데 분노, 미움, 질투, 탐욕 하는 마음속에는 무지도 있지만 순수한 깨달음의 지혜도 함께 섞여 있다. 이는 파도에 물의 젖는 성질과 바람의 움직이는 성질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 미움, 질투, 탐욕하는 마음 지혜를 직접적으로 파괴하거나 없애지는 못한다고 했다. 파도가 없어지려면 바람이 멈추어야 하듯이 분노나 탐욕심이 없어지려면 무지의 작용이 멈추어야 한다.
사랑을 예로 들면 무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사랑은 집착, 분노, 미움, 질투의 파도를 일으키고 지혜가 작용하는 사랑은 자비와 연민, 존중의 파도를 일으킨다. 이때 분노하고 질투하는 마음에도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만일 그 분노하고 질투하는 마음에서 무지가 제거되면 지혜의 사랑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의 자비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장애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이를 차별하지 않고 사심 없이 평등하게 대하고 인연 따라 선행을 베풀고 사람들의 성장과 깨달음을 돕는다는 것이다.
4, 선천적 깨달음의 작용성정본각性淨本覺의 체體라고 한다.
復次覺體相者 有四種大義 與虛空等 猶如淨鏡 云何爲四
선천적 깨달음은 허공처럼 차별 없이 평등하고 맑은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를 비춘다. 선천적 깨달음이 허공과 같고 맑은 거울과 같다는 말에는 네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⑴ 텅 빈 거울과 같다.
一者如實空鏡 遠離一切心境界相 無法可現 非覺照義故
선천적 깨달음은 맑고 텅 빈 거울과 같다. 그래서 마음으로 선을 긋고 차별하는 모든 관념과 생각의 심상이 없다. 또 텅 비어서 드러내 비추어 보일 것조차 없다.
【설명】
여기서는 선천적 깨달음의 본질을 맑고 텅 빈 거울에 비유하고 있다. 맑고 텅 비었다는 말은 일체의 관념, 생각, 편견이 소멸되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관념, 생각의 산물인 심상도 사라졌다. 쉽게 말해서 신, 알라, 부처에 대한 차별적 생각과 우열이 소멸되고 인종차별, 성차별 등 마음으로 선을 긋고 마음의 벽을 쌓는 온갖 그릇된 관념과 편견이 사라져서 마음이 마치 맑고 깨끗한 거울처럼 텅 비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편견이나 인종적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비추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 자기 합리화나 부정, 투사 등의 모든 방어기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일체의 현상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춘다.
⑵ 지혜 종자를 물들이고 스며들게 하는 거울이다
二者因熏習鏡 謂如實不空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 不出部入 不失不壞 常住一心 以一切法卽眞實性故 又一切染法所不能染 智體不動 其足無漏 熏衆生故
선천적 깨달음의 본질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세속적인 차별을 드러내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 자체는 인식 대상들에 대한 세속적인 차별에 집착하지 않고 또 인식 주체에 집착하지 않는다.선천적 깨달음(本覺)이 인식대상에 대한 세속적인 차별, 즉 이름, 관념의 심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한문에서는 불출(不出)이라고 표현했다. 또 동시에 인식 주체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불입(不入)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 자체는 없어지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고 항상 한마음에 머무른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비추기 때문에 깨달음의 거울로 비추어지는 모습은 모두가 진실된 실상의 모습니다. 또 그릇된 관념이나 생각이 깨달음을 오염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혜 자체는 어리석음에 동요되지 않기 때문이다.염화미소, 연꽃이 상징하는 가르침이 여기에 해당한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에 집착하면서 반응하지 않기금강경 4구게의 하나인 응무소주이생기심을 말한다. 때문에, 그릇된 관념과 생각의 종자는 생겨나지 않고 순수한 지혜의 종자가 중생들을 지혜로 물들이게 된다.
【설명】
한 마디로 설명하면 선천적 깨달음 자체에는 어떠한 관념도 생각도 없기 때문에, 외부 대상의 인연이 부딪쳐오면 그릇된 관념과 생각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을 비추어 준다는 것이다. 또 집착하는 관념이나 생각이 없이 비추기 때문에 외부 대상에 물들지 않고 동요되지 않는다. 그래서 잘못된 관념의 종자를 만들지 않고 순수한 지혜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지혜로 물들인다.
예를 들면 선천적인 깨달음의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이든 알라든 부처든 그런 관념적인 심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인이고 기독교인이고 불교인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종교나 인종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종교가 더 우월하고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전도한다고 해도, 관념적인 주장에 휘말리거나 오염되지 않는다. 말이나 관념, 심상에 동요되지 않기 때문에 잘 못된 종교적 신념을 만들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본래의 지혜로써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종교의 벽을 허물게 하고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의 망상을 깨뜨리고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⑶ 현상적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거울이다.법출리경(法出離鏡)이라 한다.
三者法出離鏡 謂不空法 出煩惱礙 智礙離和合相 淳淨明故
깨달음의 지혜는 현상에 반응하면서도 집착이 없기 때문에 정서 장애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인한 마음의 번뇌로 번뇌장이라 한다. 와 인지 장애 아견, 아만, 아치로 인한 지적 장애로 소지장이라 한다. 자아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집착, 어리석음으로 인한 장애를 말한다. 를 벗어나 있다. 그 결과 ‘나’와 ‘너’를 분별하고 차별하는 과거의 기억, 경험, 습관의 때를 벗어나서 깨끗하고 맑고 밝아졌다.
【설명】
다양하게 드러나는 현상의 차별적인 모습을 보고도 집착하지 않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정서적 반응이나 자아에 대한 착각이나 집착이 없다. 또 자기중심적으로 우열을 가리고 선악을 평가하지 않지 때문에 의식 · 무의식적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하다.
즉 깨달은 마음은 모든 다양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비추면서도 비추어진 모습의 차이나 이름의 차이에 끄달이지 않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막힘이 없이 자유롭다.
⑷ 인연을 물들이는 거울이다.
四者緣熏習鏡 謂依法出離故 徧照衆生之心 令修善根 隨念示現故
집착함이 없이 인연 따라 물들이는 거울이다. 정서 장애와 인지 장애가 없어서 모든 현상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그들로 하여금 선의 뿌리를 닦도록 하기 위해서 각자의 수준과 상태에 맞게 필요한 모양과 형태로 드러내고 나타내어 보인다.
【설명】
자기 안에 집착하거나 착각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보는 눈 역시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각자의 수준과 상태에 맞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지혜를 얻고 깨달아 갈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어리석은 사람의 성장과 깨달음을 위해서 반드시 자비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냉정함과 무시, 두려움도 필요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비의 관세음보살님만 있은 것이 아니라 무서운 신장님과 사천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불교인들은 불교를 탄압하고 무시하는 타종교인들의 그릇된 행동들을 보고도 침묵하거나 정치인들이 종교적으로 치우친 행동을 보고도 너그러움을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묵인과 너그러움이 만일 타종교인들의 그릇된 행동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정치인들의 종교적 편향을 돕는다면 그것은 악행이다. 또 종교적 평등함을 잘못 알고 불법을 전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인연 따라 한다는 말이 그냥 무관심하거나 내버려 두라는 것이 아니다. 불법을 전할 때 자기의 이익을 생각해서 집착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방법으로 전하라는 것이다.
이상 4가지 선천적 깨달음의 특징은 수행자가 내면의 불성을 바탕으로 해서 수행해서 깨닫게 되면 그 마음이 크고 원만한 거울처럼 된다.(대원경지) 그래서 중생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환하게 비추게 되고(평등성지), 집착하지 않고 번뇌와 망상이 없이 중생의 있는 그대로의 다양한 모습들을 비추고(묘관찰지), 그 결과 비추어진 중생의 다양한 모습과 일체가 되어 대자비로 그들의 수준과 상태에 맞추어서 그들을 이익되게 한다(성소작지)는 유식의 4가지 지혜와도 유사하다.
Ⅱ 무지[不覺]
1,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所言不覺義者 謂不如實知眞女法一故 不覺心起而有其念 念無自相 不離本覺
猶如迷人依方故迷 若離於方則無有迷 衆生亦爾 依覺故迷 若離覺性則無不覺
以有不覺妄想心故 能知名義 爲說眞覺 若離不覺之心 則無眞覺自相可說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는 모든 정신적 · 물질적 현상의 본질적 속성은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고 어리석은 생각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나 관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천적인 깨달음과 분리되어 홀로 머무르지 못한다. 마치 방향을 모르는 사람이 방향에 의지해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만약 방향을 버리면 방향에 대한 무지도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역시 마찬가지다. 깨달음이 뭔지 모르면서 깨달음에 의지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다. 만일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버리면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도 없어지게 된다. 바로 깨닫지 못했다는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그 망상심에 근거해서 온갖 명칭과 뜻을 붙여서 바른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깨닫지 못했다는 마음을 버리면 진짜 깨달음 자체도 또한 설명할 만한 것이 없어지고 만다.
【설명】
깨달음은 일체가 한몸이고 한마음인 상태이기 때문에 주객이 따로 없고 ‘나’와 ‘너’가 분리되지 않는다. 마치 놀이에 완전히 몰입한 어린아이가 놀고 있는 자신인 ‘나’와 함께 놀고 있는 친구인 ‘너’를 잊어버리고 ‘나’와 ‘너’가 하나가 되어 놀이 자체가 되어버린 상태와도 같다. 진실로 깨닫게 되면 깨달음의 주체가 되어버린 상태와도 같다. 진실로 깨닫게 되면 깨달음의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이 사라지고 깨달음만 남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서 능가경에서 행위는 있으되 행위자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상태는 ‘나’와 ‘너’가 완전한 하나, 한마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일체의 현상을 주객으로 분리하여 인식대상으로 받아들인다. 또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설명과 개념 정의가 필요하게 되고 그 결과로 갖가지 관념, 생각, 신념 등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말로써 설명되고 관념과 개념으로 정의된 것들은 진짜 실체가 아니다.
다음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주객 분별이 일어나고 그릇된 관념과 생각들이 발생하는 단계와 작용들을 설명하고 있다.
2. 무지의 특징
復次依不覺故生三種相 與彼不覺相應不離 云何爲三 一者無明業相
以依不覺故心動 說名爲業 覺則不動 動則有故 果不離因故 二者能見相
以依動故能見 不動則無見 三者境界相 以依能見故境界妄現 離見則無境界
깨닫지 못함은 세 가지 특징을 만든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모두 깨닫지 못함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한 상태 그 자체다.
⑴ 불각으로 인한 행위가 생겨난다.무명업상(無明業相)을 말한다. 이는 과거 세세생생 익혀서 종자로 저장된 습관, 관념, 개념 등 일체의 정서적 · 인지적 · 감각적 체험의 총합을 말한다. 깨닫지 못하면 이들의 종자가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무의식 속에서 작용한다.
깨닫지 못함에 의지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 어리석은 행위)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면 고통이 있게 되는데 이는 결과가 원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⑵ 인식의 주체가 생겨난다.능견상(能見相)을 말한다.
마음이 움직이면 보는 작용, 즉 인식의 주체가 생겨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작용도 없어진다.
⑶ 인식의 대상이 생겨난다.경계상(境界相)을 말한다.
인식주체에 의해서 인식대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때의 인식대상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인 심상이다. 인식의 주체가 사라지면 인식의 대상도 사라진다.
【설명】
여기서 말하는 깨닫지 못함은 제8식 저장식의 무지를 말한다. 즉 저장식이라는 바다에 무지의 바람이 일어나면 세 가지 파도를 일으킨다.
첫째는 모든 것을 주객으로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발생한다.저장식의 인식작용은 접촉, 느낌, 개념화, 의지 5가지다. 이들 각각의 작용과 정은 주객을 분별하고 아주 깊은 무의식의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둘째는 주객 분별에 의해서 인식주체가 생겨나고, 셋째는 인식 대상이 생겨난다. 그런데 그러한 분별하는 작용은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무지 가운데서도 가장 뿌리 깊은 무지이고 무의식적인 무지다. 따라서 저장식의 무지는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쌓여진 습관, 기억, 감각, 정서, 사고 등의 총합적 무지이기 때문에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자각이 어렵고 그 뿌리가 제거되지 않는다.
3. 무지의 작용
以有境界緣故 復生六種相 云何爲六
一者 知相 依於境界 心起分別 愛與不愛故
二者 相續相 依於智故 生其苦樂 覺心起念 相應不斷故
三者 執取相 依於相續 緣念境界 住持苦樂 心起著故
四者 計名字相 依於妄執 分別假 名言相故
五者 起業相 依於名字 尋名取著 造種種業故
六者 業檕苦相 以依業受果 不自在故
인식대상에 대해서 인식주체는 6가지로 작용한다. 첫째, 분별작용이다.지상(智相)이라 한다. 인식대상에 따라서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을 일으킨다. 둘째, 연속작용이다.상속상(相續相)이라 한다. 분별작용에 의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나머지 고통과 즐거움을 일으키고 감각, 지각, 정서, 사고, 기억 등으로 그릇된 관념을 일으켜서 서로 자극-반응하여 끊어지지 않게 만든다. 셋째, 집착해서 붙잡는 작용이다.집취상(執取相)이라 한다. 인식대상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을 함으로써 집착을 일으킨다. 넷째, 생각하고 계산하고 이름을 붙이는 작용이다.계명자상(計名字相)이라 한다. 잘못된 집착으로 거짓된 명칭과 의미를 부여하고 차별한다. 다섯째, 행위를 일으키는 작용이다.기업상(起業相)이라 한다. 이름에 따라서 집착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행위를 짓는다. 여섯째, 행위에 따라서 고통을 받는 작용이다.업계고상(業繫苦相)이라 한다. 업의 결과로 고통을 받고 업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고 삼계를 생사고락으로 윤회하게 된다.
【설명】
제7식인 마나식에 있는 무지의 작용을 설명하고 있다.마나식에서의 주객 분별은 항상 자아가 영원한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믿고 착각하고 그런 자아에 대해서 프라이드를 갖고 집착하는 그릇된 생각과 탐욕하고 분노하고 어리석음의 심리적 독성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행해지는 무지의 특성은 그릇되게 계산하고 생각하는 작용이다. 앞에서 중생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와 ‘너’를 구분하고 주체와 객체를 분별해서 인식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저장식에서는 주객의 이원적 분별이 일종의 잠재적 성향, 에너지로 드러난다면, 마나식에서는 무의식적 사고, 계산, 생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마나식에서 이루어지는 주객분별의 이원적 성향은 훨씬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만 여전히 무의식적인 작용이다.
예를 들어보자. 저장식은 우리들이 살면서 듣고 보고 경험한 것들을 담고 있는 무의식적 기억창고다. 마나식은 저장식이라고 하는 기억창고에 쌓어진 수많은 기억과 경험들을 자기와 동일시해서 ‘나’라고 생각한다. 즉 과거에 경험한 생각, 감정, 기억이 자기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인식주체가 되어 현재 하고 있는 체험을 인식대상으로 삼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평가한다(분별작용). 그러한 주객 분별 작용을 통해서 과거의 경험, 즉 자아의 개념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생각 속에 계속 유지된다(연속작용). 또 끊임없이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생각 속에 붙잡아 두고(집착), 다른 것과 구분해서 여러 가지 이름과 의미를 부여 한다(이름을 붙임). 그런 다음 자기가 집착하는 생각과 관념,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다. 또 다른 사람들의 관념과 생각이 자기와 일치하면 좋아하고, 불일치하면 미워하고 공격한다(그릇된 행위). 그 결과로 여러 가지 고통과 불안의 과보를 받게 된다(업으로 인한 고통).
4. 심상은 무지의 소산
當知無明能生 一切染法 以一切染法 皆是不覺相故
무지가 원인이 되어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모든 그릇된 관념과 개념, 신념을 만들어 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그릇된 관념들은 다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설명】
같은 개가 짓는 소리를 한국 사람은 ‘멍멍’으로 듣고, 미국사람은 ‘워프’로 듣는다. 하나의 진리를 두고 기독교는 ‘여호와’라 하고, 이슬람은 ‘알라’라 한다. 또 불교는 ‘부처’라 한다. 또 동일한 눈을 가리키면서 한국 사람은 ‘눈’이라고 하고, 미국 사람은 ‘스노우’라고 한다. 이름이 다르다고 진실로 뜻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눈이나 개는 신, 알라, 부처와 같은 심상과는 달리 실제로 마음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이름이 달라도 같은 대상을 뜻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심상은 마음속에 생각과 관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름이 다르면 의미도 다른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똑같은 진리를 가리키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너무 긴 세월 동안 접촉 없이 독립적으로 생성, 유지, 변화, 소멸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군가 영어로 ‘스노우’가 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무식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50년 전에는 ‘스노우’가 우리말로 ‘눈’이라는 사실을 몰라도 부끄럽거나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신’과 ‘부처’가 완전히 다른 별개라고 생각하고 공격하고 미워하면서도 자신의 무식함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지만, 3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면 ‘부처’와 ‘신’이 똑같은 하나의 진리임을 알지 못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무식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부디스트-그리스찬 또는 그리스찬-부디스트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5.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공통점과 차이점
復次覺與不覺有二種相 云何爲二 一者同相 二者異相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깨달음은 본각, 즉 선천적 깨달음을 가리키고 깨닫지 못함은 무명불각, 여래장, 저장식을 말한다.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⑴ 공통점
言同相者 譬如種種瓦器 皆同微塵性相 如是無漏無明種種業幻 皆同眞如性相
是故修多羅中 依於此眞如義故 說一切衆生 本來常住入 於涅槃菩提之法
非可修相 非可作相 畢竟無得 亦無色相可見 而有見色相者
唯是隨染業幻所作 非是智色不空之性 以智相無可見故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공통점을 질그릇에 비유해서 말하면 모양이 다양해도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깨달음과 깨달지 못함 역시 본질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에 경에서는 모든 중생은 처음부터 깨달아 있다고 말한다. 깨달음은 닦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없던 것을 만들어 내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런데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분별하는 것은 오직 그릇된 관념과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일 뿐 진짜 깨달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⑵ 차이점
言異相者 如種種瓦器 各各不同 如是無漏無明 隨染幻差別 性染幻差別故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차이점은 여러 가지 모양의 질그릇이 각기 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에는 차이가 있다.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평등하지만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모양의 질그릇처럼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현상적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무지는 질그릇의 모양을 단순히 외형적 · 현상적 차이로서가 아니라 본질적 차이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환경과 조건의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이해한다.
【설명】
여기서는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본질적으로는 평등하고 같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중생과 부처가 동등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과 부처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면 중생이 아무리 수행하고 깨달아도 부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중생이면 닦는다고 부처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깨달은 사람은 인종, 성별, 종교, 관념, 생각의 차이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 · 현상적 차이라고 생각하다. 반면에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근본적인 차이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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