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행 스님법어

5장 깨달음과 생사윤회의 갈림길

혜주 慧柱 2022. 3. 5. 08:56

復次有四種法熏習義故 染法淨法起不斷絶 云何爲四 一者淨法 名爲眞如 二者一切染因 名爲無明 三者妄心 名爲業識 四者妄境界 所謂六塵 熏習義者 如世間衣服 實無於香 若人以香而熏習故 則有香氣 此亦如是 眞如淨法 實無於染 但以無明而熏習故 則有染相 無明染法 實無淨業 但以眞如而熏習故 則有淨用

 

중생은 다음의 4가지가4가지 가운데 진여를 반복해서 익히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고 나머지 무명, 인식주관, 인식대상의 셋을 반복해서 익히는 것은 생사윤회로 가는 길이다. 스며들도록 반복해서 익힘으로써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어리석음에 물들어 생사를 윤회하는 고통을 반복할 수도 있다.

첫째는 맑고 올바른 진여법을 반복해서 익히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오염의 원인인 무명을 반복해서 익힌다.

셋째는 그릇된 마음에서 일어난 인식주체를 반복해서 익힌다.

넷째는 그릇된 인식대상인 색 · · · · · 법을 반복해서 익힌다. 스며들도록 익힌다는 의미는 옷이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만 만약 사람이 향을 뿌려서 스며들게 하면 그로 인해서 향기가 배어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순수하게 깨끗한 진여는 전혀 오염이 없지만 무명으로 스며들어 배도록 함으로써 오염이 가능하다. 반대로 무명으로 오염된 현상에는 순수하고 깨끗함이 없지만 진여로써 스며들어 배게 함으로써 순수하고 깨끗한 작용이 가능한 것이다.

 

설명

여기서는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인간 존재의 삶이 두 극단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성장의 길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나아가는 파괴의 길이다.

그런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성장의 길은 인간 본연의 삶의 목적과 가치에 부합하는 진화의 길이다. 깨달음의 길은 오직 맑고 올바름을 닦는 길뿐이다. 반대로 어리석고 무지함으로 나아가는 길은 인간으로서의 존재 자체의 목적과 가치에 역행하는 고통과 속박의 길이다.

어리석음의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상대방이나 환경과 상황에 대한 배려 없이 자아에 집착해서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좋아하는 대상에 집착하고 갈구하면서 눈 · · · · 몸의 오감과 생각으로 구하고 찾는 행위다.

맑고 올바른 마음에도 어리석음의 때가 껴서 오염될 수 있고 더럽고 어리석은 마음도 맑고 올바른 마음으로 정화시킬 수 있다. 개인에 따라서 점점 더 어리석음으로 나아가는 퇴보와 역행의 삶을 살기도 하고 점점 더 깨달아가는 성장과 진화의 삶을 살기도 한다. 전자는 고통의 삶이고 후자는 행복의 삶이다.

 

 

. 생사윤회로 가는 길

 

云何熏習起染法不斷 所謂以依眞如法故 有於無明 以有無明染法因故 卽熏習眞如 以熏習故 則有妄心 以有妄心 卽熏習無明 不了眞如法故 不覺念起現妄境界 以有妄境界染法緣故 卽熏習妄心 令其念著 造種種業 受於一切身心等故

어떻게 오염된 현상이 생겨나고 반복적으로 익혀져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가? 이는 진여의 실상에 허상인 심상과 표상에 반대되는 말로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양을 의미한다.

무명의 바람이 일어나서 무명이 진여의 실상에 스며들고 반복해서 익혀진다. 그리고 무명을 반복해서 익힘으로써 아뢰야식이 생겨나게 된다. 무명에 의해서 생겨난 아뢰야식이 이번에는 역으로 무명을 불러일으켜서 진여의 실상을 알지 못하도록 한다. 따라서 깨닫지 못한 생각, 관념, 신념 등이 허상인 심상을 만들어 낸다. 생각으로 만들어진 심상이 조건이 되어서 이번에는 역으로 그릇된 관념과 신념을 반복해서 익힌다. 그리고는 그렇게 익혀진 관념과 생각이 굳어지고 드러나면서 각종의 업을 짓는다. 그 결과 온갖 몸과 마음의 고통을 받는다.

 

설명

여기서는 그릇된 관념이나 생각이 발생하고 반복하고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초로 발생하는 무명은 잔잔한 호수에 번뇌망상의 물결을 일으키는 바람에 비유할 수 있다.유식 30송에 의하면 최초의 무명은 홀연히 일어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는 진여에 의해서, 즉 호수가 있기 때문에 바람이 물결을 일으킬 후 있듯이 진여가 있기 때문에 무명이 번뇌망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처음 발생한 물결이 새로운 물결을 만들면서 퍼져나가듯이 무명에 의해서 생겨난 그릇된 관념과 생각들은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고 보태지면서 무의식적으로 저장된다.

그렇게 무의식에 저장된 그릇된 관념과 생각들이 다시 새로운 어리석음을 만들면서 있는 그대로의 실제 모습을 가려서 왜곡시키고 진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만든다. 또 그릇된 관념과 생각이 만들어낸 심상을 통해서 그 관념과 생각을 강화시키고 그에 따른 행위를 짓고 그 과보로 고통을 받는다.

예를 들어보자, 무지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무지는 자아에 대한 착각과 집착과 우월감을 낳았다. 그래서 그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그릇된 관념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의 남성 우월적인 관념은 다시 남자는 여자보다 화통하고 머리가 좋고 생각이 넓고 깊고, 남자는 항상 여자보다 잘나야 된다는 등의 불합리한 생각과 신념, 편견을 굳게 믿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직장이나 가정에서 사소한 일에도 사사건건 남자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여자를 무시했다. 당연히 무시 받은 여자들은 그를 역으로 무시했기 때문에 직장에서는 대인관계를 어렵게 만들었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인간은 누구나 절대평등하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가 남성 우월적인 그릇된 관념과 신념, 편견을 만들었다. 그릇된 관념과 신념은 다시 여성을 무시하는 불합리한 행동을 낳았다. 그래서 다투고 미워하고 갈등하는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1, 인식대상에 대한 그릇된 작용 여기서는 5감각식과 제6의식이 인식대상을 그릇되고 분별하고 집착한 결과로 발생하는 생사윤회의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此妄境界熏習義則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增長念熏習 二者增長取熏習

인식대상을 그릇되게 반복해서 익히는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식대상을 분별하고 차별하는 5감각식과 제6의식의 작용을 강화하고 증대시킨다. 둘째는 차별하고 분별되어진 인식대상에 집착을 강화하고 증대시킨다.

 

설명

앞의 남성 우월적인 관념을 가진 남자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여러 인종, 민족, 연령, 성별, 직업, 학력, 인격, 취미, , 몸무게 등등 셀 수 없이 무한히 다양한 조건으로 구성된 인간을 유난히 남자와 여자라는 이원적 분류를 선택했다. 키나 외모, 학력, 능력, 직업 등등 자기를 들어내고 과시할 수 있는 기준이 무수히 많은데 유난히 남녀차별에 집착했다면 학력이나 직업 등으로는 자기 프라이드를 가질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경우는 무의식적인 자기 콤플렉스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남녀를 분류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극단적 · 대립적 차별을 부여함으로써 남녀차별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강화시켰다. 그리고는 자기는 남자라는 생각에 집착해서 자기가 더 잘났다고 굳게 믿고 여자를 무시하는 그릇된 행동을 일으켜 깨달음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고통은 의식이 자아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지 못해서 일어나는 인지적 번뇌다. 다시 말해서 남자가 더 우월하다는 잘못된 생각이 고통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또 자아에 대해서 잘못 알고 탐욕하고 집착한 나머지 그릇된 윤리나 행동양식을 증대시킨 결과로 정서적 번뇌를 발생시킨다. 즉 인지적 번뇌가 사고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라면 정서적 번뇌는 감정적으로 집착해서 일어나는 고통과 갈등을 말한다.

이 단계는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일체의 대상을 의식 수준에서 잘못 생각하고 느껴서 집착한 나머지 잘못 행동하는 결과에 따른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2, 인식주관에 대한 그릇된 작용 마나식이 인식주관인 자아에 대해서 잘못 분별하고 집착함으로써 발생하는 생사 윤회하는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妄心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業識根熏習 能受阿羅漢辟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 二者增長分別事識熏習 能受凡夫業繫苦故

그릇된 마음을 반복해서 익히는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마나식을 반복해서 익히는 것이다. 이는 성문, 연각, 보살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생사윤회의 작용과 고통이다.여기서는 감각식과 의식의 분별로 육도를 윤회하는 생사고통은 벗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마나식으로 무명을 훈습하여 허상임을 잘 모르고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끊임없이 일으킨다. 쉽게 말해서 의식 수준의 분별은 벗어났지만 무의식 수준의 분별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삼계는 벗어났으나 성불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성불할 때까지 성문, 연각, 보살의 성자가 받는 삼계 밖의 생사작용 즉 무의식적 생사작용(아뢰야식의 작용)으로 인한 고통은 여전히 남아있다. 둘째는 범부의 경기로서 5감각과 제6의식의 분별작용으로써 일어나는 고통이다. 이는 마나식의 잘못된 영향으로 5감각과 의식이 모양과 이름에 집착해서 몸과 입으로 잘못 행동하여 육도윤회의 고통을 받는다.

 

설명

남성 우월증을 예로 들어보자. 첫째는 남자가 더 우월하다는 관념이 의식수준에서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자니까하는 프라이드가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의식에는 여전히 남성우월증이 작용한다. 그런데 둘째는 그러한 무의식적인 남성우월증이 마음속 깊숙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5감각과 의식의 작용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무의식적인 말과 행동으로 남자의 프라이드를 드러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남녀차별과 분별과 같은 그릇된 관념, 즉 자기가 더 잘났다는 잘못된 견해나 집착이 무의식에만 존재하느냐, 아니면 그것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느냐에 따라서 정신수준을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무의식에는 존재하지만 실제 행동과 말로 드러나지 않으면 마음 수행이 상당히 깊은 성자의 수준이고 겉으로 드러나면 일반 중생이라는 것이다.

 

3, 무명의 그릇된 작용

 

無明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根本熏習 以能成就業識義故 二者所起見愛熏習 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

어리석음을 반복해서 익히는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무명을 반복해서 익힘으로써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마나식을 일으킨다. 둘째는 근본무명에서 일어난 마나식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인지적 · 정서적 무지아견, 아애, 아만의 그릇된 견해와 탐진치의 번뇌가 5감각식과 6식을 일으켜서 인식대상을 분별하도록 한다.

 

설명

세세생생 익혀서 무의식 깊숙이에 저장된 무지의 종자들이 가 절대적이고 영원하다는 그릇된 견해를 만든다. 그리고는 그런 에 집착하고 교만해져서 자기 우월감과 패배감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오감과 의식을 작동시켜서 대상을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 분류한다. 자아개념에 일치하고 우월감을 준다고 믿고 착각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좋아하고 욕망과 탐욕을 일으킨다. 반대로 자아개념에 맞지 않거나 패배감을 준다고 믿고 착각하는 대상은 싫어하고 분노하고 공격한다. 또 잘못된 자아개념에 맞추고 살찌울 수 있는 대상을 찾아서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코는 냄새 맡고 몸은 감지하고 혀는 맛을 보면서 분별하고 탐욕하고 집착하게 된다.

 

 

.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

 

1, 진여수행

 

云何熏習起淨法不斷 所謂以有眞如法故 能熏習無明 以熏習因緣力故 則令妄心厭生社故 樂求涅槃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 卽熏習眞如 自信己性 知心妄動 無前境界 修遠離法 以如實知無前境界故 種種方便起隨順行 不取不念 乃至久遠熏習力故 無明則滅 以無明滅故 心無有起 以無起故 境界隨滅 以因緣俱滅故 心相皆盡 名得涅槃 成自然業

어떻게 맑고 올바름을 익혀서 단절되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가?

이는 진여가 무명에 스며들어 배도록 반복해서 익힌다. 그래서 잘못된 마음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잘못된 마음으로 하여금 진여를 반복해서 익혀서 마음의 본성인 진여를 믿도록 한다. 보살의 52단계 수행 중 제1단계

그리하여 무명에 의해서 마음이 잘못 움직이는 것이고, 그 잘못된 마음이 차별하고 분별해서 일어난 인식의 대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차별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닦는다. 성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닦는 수행의 경지로서 보살수행의 52단계 중 11~40단계까지의 수행이 여기에 해당된다. 인식대상은 허구하는 사실을 주시하는 단계-인식대상은 허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주시하는 단계-인식대상이 허구하는 시실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나아가서 인식주관도 허구라는 사실을 주시하는 단계의 수행이다. 분별하고 차별화된 인식대상이 허상임을 완전하게 안다. 52단계 수행 중 41단계. 유식 30송에서 견도 · 가행위에 해당. 처음으로 성자라 칭하는 지위. 후천적으로 일어나는 인지적(소지장) 정서적(번뇌장) 장애의 종자를 끊고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정서적 장애의 활동을 눌러버리는 자리다. 인식대상뿐만이 아니라 인식주관도 허구하고 확실하게 인정하는 단계다.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으로 닦아서 있는 그대로의 순리를 따를 뿐, 집착과 그릇된 생각이 없다. 욕망, 그릇된 견해, 그릇된 윤리와 행동양식,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다.

또 현상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오랫동안 닦고 익힌 힘에 의해서 무명이 곧 멸하게 된다. 유식의 수도위 · 견도위에서 온갖 인지적인 무명을 벗어난 다음에 정서와 사고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수행을 쌓는 기간이다. 소승의 44과의 기간이고 보살수행에서는 41~50단계에 해당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인식주관이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인식의 대상도 멸한다. 결과적으로 생각과 관념으로 만들어진 마음의 이미지심상을 말한다.인 허상과 생각과 관념의 영향으로 왜곡되어 드러났던 표상이 다 없어진다. 심상: 실제로 외부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 낸 인식론적 존재다 표상: 실제로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실존적 존재다. 그러나 주관적인 생각과 관념의 영향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왜곡되어 드러나고 해석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열반을 성취하고 중생을 교화하고 이익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인시의 주관과 객관이 완전하게 사라진 열반의 경지에서 드러나는 4가지 지혜. 즉 대원경지, 묘관찰지, 평등성지, 성소작지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깨달음으로 이끈다.

 

설명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중생이 가지고 있는 무지를 제거하고 깨달을 수 있는가를 전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깨달음이 가능한 것은 우리 내면 깊숙이에 양심, 또는 진리, 불성이라 불리는 선천적인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불합리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하고 갈등이 일어나서 종국에는 고통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고통의 순간에 뭔가 자기의 마음이 잘못 생각하고 진리에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음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이 자기 자신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남녀를 차별하는 것이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집착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어머니의 인정과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분노나 콤플렉스의 반작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잘못된 편견과 집착이 사라진다.

또 집착을 버림으로써 차별적인 무지가 사라지고 라고 하는 인식의 주관과 대상의 이원적 구분도 사라진다. 그 결과 평등심을 얻고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존중하고 그들을 이익되게 하는 선업을 쌓게 된다.

 

2, 망심의 진여수행

 

妄心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分別事識熏習 依諸凡夫二乘人等厭生死苦 隨力所能 以漸趣向無上道故 二者意熏習 謂諸菩薩發心勇猛 速趣涅槃故

그릇된 마음이 진여를 반복해서 익히는 수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일체 현상이 다 마음이 만들어 낸 심상이거나 표상인 줄을 알지 못하는 모든 범부아직 보살수행의 1단계에도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와 단지 아가 비어 있다는 사실에만 주시하는 성문 · 연각마나식과 아뢰야식. 그리고 의식수준에서의 주객 분별을 알지 못함. 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해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수행이다. 둘째는 일체의 정신적 · 물질적 현상들이 모두 마음의 작용으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보살이미 보살수행의 1단계 이상에 들어온 사람들.이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 열반으로 나아가는 수행이다. 이 수준에 있는 보살은 이미 5감각과 제6의식의 수준에서는 주객을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마나식의 수준에서 진여를 닦는다.

 

설명

모든 중생의 마음 안에는 불성, 양심, 지혜, 진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삶의 본질과 가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지로 인해서 일어나는 삶의 고통을 싫어하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수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삶의 고통을 싫어하고 마음수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정신 수준은 대략 두 종류다.

첫째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희로애락이 결국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모조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더 많은 욕망을 채우고자 수행을 시작하는 범부들의 수준이다. 아니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허무를 깨닫고 자기 존재가 영원하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생사의 고통을 싫어해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수준이다.

둘째는 이미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이고 심상이고 허상임을 아는 상당히 높은 정신적 수준에서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보살의 경지가 있다.

여기서는 마음수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세 유형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는 무조건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구하는 범부들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존재와 삶의 허무를 알고 뭔가 자아의 본질이나 가치, 의미를 추구하는 유형이다. 나머지 하나는 일찌감치 모든 인간의 문제가 다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마음자체를 깨닫고자 수행을 시작하는 유형이다.

 

3, 두 종류의 진여수행

 

眞如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自體相熏習 二者用熏習

진여를 익히고 수행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내면에 있는 진여를 닦아서 익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환경에서 오는 진여를 닦아서 익히는 것이다.

 

내면에서 작용하는 진여수행

自體相熏習者 從無始世來 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 作境界之性 依此二義恒常熏習 以有力故 能令衆生厭生死苦 樂求涅槃 自信己身有眞如法 發心修行 問曰 若如是義者 一切衆生悉有眞如 等皆熏習 云何有信無信 無量前後差別 皆應一時自知有眞如法 勤修方便 等入涅槃 答曰 眞如本一 而有無量無邊無明 從本已來 自性差別 厚薄不同故 過恒沙等上煩惱 依無明起差別 我見愛染煩惱 依無明起差別 如是一切煩惱 依於無明所起 前後無量差別 唯如來能知故 又諸佛法有因有緣 因緣具足 乃得成辦 如木中火性 是火正因 若無人知 不假方便 能自燒木 無有是處 衆生亦爾 雖有正因熏習之力 若不遇諸佛菩薩知識等以之爲緣 能自斷煩惱入涅槃者 則無是處 若雖有外緣之力 而內淨法未有熏習力者 亦不能究竟厭生死苦樂求涅槃 若因緣具足者 所謂自有熏習之力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 能起厭苦之心 信有涅槃 修習善根 以修善根成熟故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 乃能進趣向涅槃道

본래부터 번뇌 망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고 깨끗해서 불가사의한 작용으로 스스로를 교화하고 이익되게 하는 진여자체의 작용적 특징이다. 내면으로부터 항상 맑고 올바른 것을 익히려는 진여의 힘에 의해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기 안에 이미 진여가 있음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한다.

만일 모든 중생이 다 자기 마음속에 진여를 이미 가지고 있다면 중생마다 그 수준이나 깨닫는 정도가 다 똑같아야 할 텐데, 어째서 믿음이 있는 중생이 있고 믿음이 없는 중생이 있고, 먼저 깨닫고 나중에 깨닫는 등 중생의 수준에 무수한 차이가 있는가? 또 중생의 마음속에는 이미 진여가 존재한다면 자기 마음속에 진여가 있다는 사실을 굳이 특별한 노력이 없어도 알 수 있어야 하고 다 같이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모든 중생들이 진여를 똑같이 타고났기 때문에 본래 평등하다면 무엇 때문에 중생의 수준이 영리하고 둔하고 올바르고 삿되고 믿음, 불신 들 제각기 다른가? 또 중생들이 똑같이 자기 안에 있는 진여를 익혀서 발심한 것이라면 당연히 다 같이 똑같이 수행하고 똑같이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차이가 있는가?

진여는 본래부터 성인에게 있는 것이나 범부에게 있는 것이나 똑같이 동일하지만 성인과 범부가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평등했던 성품에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즉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어난 탐진치, 거만, 의심, 악견의 근본무명과 이로 인한 분노, 원한, 위장, 고뇌, 질투, 인색, 아첨, 들뜸, 게으름, 불신 등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번뇌가 본래 똑같이 깨끗하고 순수한 진여에 물들이는 오염의 정도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인지적 · 정서적 장애도 다르기 때문에 중생들 사이에 깨달음의 정도와 수준에도 무수한 차이가 있게 된 것이다. 오직 무명에 오염되지 않는 진여와 완전하게 하나가 된 여래만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또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현상에는 내적인 직접적 원인[]과 외적인 간접적 조건[]이 있다. 이 두 인과 연이 갖추어져야 현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나무에 있는 불이 붙는 성질은 내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불을 붙이는 도구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나무가 저 혼자서 자기를 태울 수는 없는 일이다.

중생도 내적인 원인으로써[] 작용하는 진여를 익히는 힘이 있지만 만약 모든 부처, 보살, 선지식 등을 인연으로 만나서 그들로 하여금 외적인 조건[]으로 삼지 못한다면 중생이 스스로 번뇌를 끊고 깨달음에 들어갈 수가 없다. 또 외적인 조건은 있지만 안으로 진여를 익힐 만한 힘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또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깨달음을 즐겨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깨달음에 필요한 인연이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안으로는 스스로 익히는 힘이 있고 또 밖으로는 모든 부처 · 보살 등의 자비와 보호를 받기 때문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안에 이미 깨달음의 종자가 있음을 믿고 선근을 닦아 익히며 선근을 닦는 일이 성숙해지면 모즌 부처님과 보살이 가르치는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여 이익을 얻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 깨달음의 길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설명

누구든지 깨달음의 종자, 즉 불성, 진여, 진리, 완전한 지혜를 자기 내면에 이미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를 이익되게 하고 행복하고 성장하는 길로 나아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오히려 자기를 파괴하고 망치는 길로 나아간다. 또 똑같이 노력하지만 더 지혜롭게 성장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모든 인간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고 본질적으로 절대평등하고 동등하며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가르침이 뭔가 모순되게 느껴지고 믿고 어려울 때가 있다.

위에서는 그런 의문에 대해서 답하기를 우리 모두는 완전히 동일한 지혜, 진여를 가지고 있지만 어리석음의 정도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깨달음의 정도나 정신적 수준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즉 지혜의 차이가 아니라 무지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문제는 지혜를 얼마나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무지를 얼마나 제거했느냐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작용하는 진여수행

用熏習者 卽是衆生外緣之力 如是外緣有無量義 略說二種 云何爲二 一者差別緣 二者平等緣 差別緣者 此人依於諸佛菩薩等 從初發意始求道時 乃至得佛 於中若見若念 或爲眷屬父母諸親 或爲給使 或爲知友 或爲怨家 或起四攝 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 以起大悲熏習之力 能令衆生增長善根 若見若聞得利益故 此緣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近緣速得度故 二者速緣 久遠得度故 是近遠二緣 分別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增長行緣 二者受道緣 平等緣者 一切諸佛菩薩 皆願度脫一切衆生 自然熏習恒常不捨 以同體智力故 隨應見聞而現作業 所謂衆生依於三昧 乃得平等見諸佛故

용훈습은 바로 발심해서 도를 구하는 중생들을 외부에서 돕는 외적인 조건()의 힘이다. 깨달음의 인연을 짓는데 필요한 외적인 조건은 무수히 많지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차별적인 인연이고오감각과 제6의식 수준에서 발심한 범부와 소승에게 다양한 형태로 감응하여 진여를 익히도록 도와주는 작용이다. 이 수준의 중생들은 번뇌의 정도가 제각기 다른 상태에서 발심했기 때문에 중생의 수준과 근기에 따라서 부처님이 감응해서 나타나는 외적인 조건도 같지 않다. 둘째는 평등한 인연이다.

차별적인 인연은 중생이 불보살에 의해서 처음으로 발심하고 도를 구하기 시작해서 성불할 때까지 수행 도중에 불보살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그 공덕을 생각하기도 한다. 불보살은 자비로 중생을 포섭하고 받아들여서 집안권속, 부모, 친척으로 화현하기도 하고 그보다 낮은 위치에서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심부름하는 급사의 인연으로 오기도 한다.

또 동등한 위치에서 마음수행을 권하려고 친구의 인연으로 오기도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서 도를 닦게 하려고 원수의 인연으로 오기도 한다. 너그럽게 베풀고 자애롭게 말하고 항상 이익을 주고 희로애락을 함께 해 주면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기도 한다. 어떤 인연의 모습으로 오든 불보살이 하는 모든 행위는 중생으로 하여금 대자비를 익히는 힘을 일으켜서 선의 뿌리를 더욱 자라게 한다. 또 불보살의 모습을 보거나 그 음성을 듣도록 하여 수행에 도움을 준다.여기서 제불보살이 중생의 깨달음을 돕는 외적 조건은 그릇된 생각의 의식적인 조작이 없는 무작대비(無作大悲)로 익히는 것을 말한다. 중생들이 그릇된 마음으로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심신 가운데 응화신이 중생들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서 그들에게 알맞게 작용해 주는 차별적인 모습을 말한다.

한편 중생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무지와 번뇌의 정도에 따라서 신속하게 생사고해의 바다를 건너기도 하고근연(近緣)을 말한다. 오랜 시간의 수행을 거쳐서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원연(遠緣)을 말한다. 또 중생이 깨달음을 앞당기기 위해서 행하는 수행으로는 너그럽게 베풀거나 절도 있는 행위를 통해서 도에 이르는 경우도 있고 진여를 듣고 생각하고 닦아서 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근연에 증장행연(增長行緣)과 수도연(修道緣) 두 가지를 설명한 것이다.

평등한 인연은 모든 불보살의 일체중생이 모두 함께 생사의 세계를 건너 해탈하도록 서원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어지고 익혀져서 한순간도 중생을 저버리지 않는다.마나식 수준에서 익히고 수행하는 모든 보살을 위하여 차별 없이 평등하게 도와주는 외부적인 조건과 인연의 힘이다. 이 수준의 보살들은 이미 모든 것이 다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심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의식 수준에서는 인식의 주체와 대상을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준에 맞게 평등하게 감응해 주는 것이다. 불보살은 중생과 한마음이 되어 중생이 보고 듣는 정도에 맞게 깨달음을 돕는다. 부처와 한마음이 된 중생은 삼매에 의하여 모든 부처를 평등하게 볼 수 있다.중생 가운데서 진여삼매에 들어갈 수 있는 자기 있기만 하다면 모두가 한몸이라는 지혜의 힘으로 중생이 과거 숙세에 익혔던 보고 들은 것에 따라서 감응하여 작용을 나타내는데, 중생의 삼매 가운데서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고 그들의 도를 성취시킨다.

 

설명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무지의 정도에 따라서 빨리 깨닫기도 하고 늦게 깨닫기도 한다고 했다. 또 무지의 정도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성장하고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가기도 하고 퇴보하고 불행한 삶으로 만들어 가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지의 정도, 즉 내면의 정신 수준과 근기에 따라서 외부로부터 오는 인연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겉으로 보여 지는 외형적 조건이나 이름에 얽매이고 관념과 편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오감각과 육식의 수준이라면 우리의 수행을 돕는 외적인 인연도 우리의 정신 수준에 맞추어서 차별적으로 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아직 탐욕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양과 이름에 따라서 차별하고 분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둑과 사기꾼을 만나서 욕심을 버리는 수행을 하기도 하고 불보살 같은 은인을 만나서 선함을 배우기도 한다. 좋은 도반을 만나서 불법에 입문하기도 하고 강도나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과 인연해서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배우기도 한다. 또 훌륭한 부모나 친척을 만나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 일찌감치 마음수행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이미 겉모양이나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싫고 좋고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없이 평등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일체가 다 마음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의식수준에서는 얽매임이 없지만 다만 무의식 수준에서만 차별이 있다. 그와 같이 무의식 수준의 깊이에서 마음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외부로부터 오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인연 또한 차별이 없이 평등하다. 그들은 삼매 중에 불보살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

결론적으로 마음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차별연이 주는 의미는 우리의 삶에서 만나고 인연하는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깨달음과 성장을 돕기 위해서 오는 불보살의 화현이라는 것이다. 또 평등연은 우리가 만나는 좋고 싫은 모든 인연들이 다 깨달음을 돕는 불보살의 화현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정신적 수준이 높은 수행자들을 위한 인연이다. 그들은 이미 명예, 지위, 물질적 부와 같은 세속적 차별을 초월했기 때문에 차별적 인연을 통해서 더 이상 깨달음을 얻을 것이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평등하게 삼매를 통해서 불보살을 만나고 깨달음을 얻는다.

 

4, 깨달음의 원인과 조건으로서의 진여 수행

 

此體用熏習 分別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未相應 謂凡夫二乘初發意菩殺等 以意意識熏習 依信力故而能修行 未得無分別心 與體相應故 未得自在業修行 與用相應故 二者已相應 謂法身菩殺 得無分別心 與諸佛智用相應 唯依法力自然修行 熏習眞如滅無明故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내적 원인과 외적 조건을 익히는 과정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는 중생이 닦고 익히는 내면의 진여와 외부환경에서 오는 진여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단계다. 즉 오감각과 의식 수준에서 수행하는 범부, 성문, 연각, 그리고 초발의 보살은보살수행에서 11단계 믿음의 힘에 의지해서 수행을 잘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 있는 아직 자기 내면에 있는 진여를 깨닫지 못하고 를 차별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오는 진여의 작용과 일치하지 못한다.외부에서 오는 진여의 작용은 수행하는 중생의 수준과 근기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중생이 익히는 내적 · 외적 진여가 일치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진여의 본질을 깨달은 법신보살보살수행의 41~50단계에 해당하는 지위, 인식의 주관과 객관대상의 분별이 허구임을 하는 단계이 진여의 무분별심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와 불가사의한 작용에 일치하여 수행한다.보살이 수행의 결과로 얻은 지혜와 작용이 부처님의 근본지혜와 작용과 서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오직 법력에 의하여 인위적인 노력이나 의지가 없이 자연적인 수행을 통해서 진여를 익히고 무명을 소멸한다.

 

설명

수행하는 사람의 정신 수준을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오감각과 의식수준의 분별심이 있는 상태에서 수행하는 단계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분별심을 제거한 상태에서 수행하는 보다 높은 단계다. 분별은 를 차별하고 주객을 차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주객을 분별하는 수준의 사람은 아직 자기 내면의 불성과 진여를 깨닫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의 깨달음을 돕는 외부의 환경이나 조건 역시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차별적으로 인연 지워진다. 그것을 가리켜서 팔만사천 가지 법문이 있다고 하고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불보살님들이 나투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분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무분별심의 진여 자체와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오감각과 의식 수준에서 분별심이 없이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불성과 진여를 어느 정도 깨달은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을 돕는 외부 환경이나 조건 역시 차별 없이 인연 지워진다. 이들은 분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심의 진여 자체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감과 의식의 차별적 수준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아직 현실적으로 다양한 체험이 필요하다. 한편 의 분별을 완전히 떠난 사람들은 보다 깊은 무의식의 수준에서 깨달음을 닦고 삼매 중에 불보살을 친견하고 그들로부터 불가사의한 가르침을 받는다.

위의 가르침을 보자면 우리 가운데 아직 분별심을 제거하지 못한 사람은 현실의 삶과 다양한 인간관계의 체험을 통해서 마음수행을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고, 분별심을 완전히 제거한 사람들은 삼매를 통해서 불보살을 친견하고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일정 기간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수행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런데 마음수행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현실의 삶과 인간관계가 복잡하고 싫다고 수행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무조건 산속이나 사람을 피해서 한가한 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 환경의 싫고 좋고 더럽고 깨끗함이 자기 내면의 분별심을 반영하고 그 마음을 닦아서 극복하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오는 불보살의 화현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더럽고 깨끗하고 좋고 싫고 괴로운 환경 때문에 더럽고 깨끗하고 좋고 싫고 괴로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5. 실상의 출현과 허상의 생멸

 

復次染法從無始已來 熏習不斷 乃至得佛 後則有斷 淨法熏習 則無有斷 盡於未來 此義云何 以眞如法常熏習故 妄心則滅 法身顯現 起用熏習 故無有斷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한 과거부터 중생은 오염되고 그릇된 관념, 생각, 편견, 신념, 심상 등의 허상들을 끊임없이 익혀왔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고 나면 그와 같은 허상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맑고 바르게 익혀진 실상은 사라지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된다. 왜냐하면 중생의 내면에 진여가 항상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릇된 마음은 멸하고 진여의 작용법신을 말한다.이 드러나면서 익혀지기 때문이다.

 

설명

그릇된 관념이나 생각, 심상은 끝이 있어서 언젠가는 소멸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지고 생겨난 것은 때가 되면 반드시 부서지고 소멸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상은 그릇된 관념이나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생의 내면 깊숙이에는 항상 진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진여가 드러나는 만큼 그릇된 마음은 소멸된다. 따라서 그릇된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 소멸되면서 실상이 드러난다.

 

6, 진여의 본질과 특징

 

復次眞如自體相者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無有增減 非前際生 非後際滅 畢竟常恒 從本已來 性自滿足一切功德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 徧照法界義故 眞實識知義故 自性淸淨心義故 常樂我淨義故 淸涼不變自在義故 具足如是過於恒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 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 名爲如來藏 亦名如來法身 問曰 上說鎭如其體平等 離一切相 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 答曰 雖實有此諸功德義 而無差別之相 等同一味 唯一眞如 此義云何 以無分別 離分別相 是故無二 復以何義得說差別 以依業識生滅相示 此云何示 以一切法本來唯心 實無於念 而有妄心 不覺起念 見諸境界 故說無明 心性不起 卽是大智慧光明義故 若心起見 則有不見之相 心性離見 卽是徧照法界義故 若心有動 非眞識知 無有自性 非常非樂非我非淨 熱惱衰變則不自在 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 對此義故 心性無動 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 若心有起 更見前法可念者 則有所少 如是淨法無量功德 卽是一心 更無所念 是故滿足 名爲法身如來之藏

진여의 본질은 모든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수행과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또 생겨났다가 나중에 소멸되는 것도 아니다.

진여의 본질적 모습은 변함없이 항구하여 본래부터 일체의 공덕이 가득 채워져 있다. 진여 자체는 큰 지혜의 빛으로비로자나법신이 진여 자체다. 항상 지혜로 빛나고 관조하여 어둠이 없다. 온 우주를 차별없이 두루 비추고 진실되게 알고,망상분별이 없으므로 현상의 실상을 안다. 그릇된 생각으로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자성이 청정하다.탐진치, 아만, 의심, 악견을 벗어났기 때문에 인지적 · 정서적 장애가 없다. 진여 자체는 불변하고 즐겁고 진짜 자아의 모습이고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열반사덕으로 현재 과거 미래에 불변의 상(), 생사의 고통을 떠난 락(), 아집을 버리고 무아의 아를 성취한 아(),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난 정()을 말한다. 불타는 번뇌를 벗어나서 청량하고 생주이멸의 번뇌가 없이 불변하고 악업에 매이지 않는 자재함을 가지고 있다. 진여는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불법을 갖추고 있다. 진여는 진여의 본질과 분리되지 않고 단절됨이 없으며 진여 자체와 다르지 않는 불가사의한 무수한 불법을 갖추고 채워져 있기 때문에 여래장 또는 여래법신이라고도 한다.진여의 본질과 현상이 상호작용하면서 하나의 본질에서 일체의 현상이 드러나고 다시 일체 현상이 하나의 본질로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본질과 현상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모두가 깨달음을 위한 인연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를 불법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여의 본질을 여래장, 여래장을 드러내는 진여의 현상을 여래법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진여의 본질은 평등하여 모든 차별적인 모양을 벗어났다고 했는데 어째서 다시 진여의 본질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차별적인 공덕의 모습이 있다고 말하는가?진여의 본질이 공[如實空]하다는 사실을 알고 진여의 본질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의 현상으로 드러날 때는 공하지 않다[如實不空]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의문이다.

비록 진여의 본질이 다양한 공덕의 현상으로 드러나지만 본질적으로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똑같은 일미一味일 뿐이며 모두가 하나의 진여일 뿐이다.그릇된 생각으로 분별하는 인식주관이 없기 때문에 분별되어질 객관대상이 없다. 즉 분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차별적인 모양을 버렸기 때문에 진여의 본질과 드러난 다양한 현상은 두 개의 다른 모습이 아니다. 그러면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니라면 어떻게 차별적인 현상의 모습을 설명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중생이 무명에 의해서 인식의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생멸하는 성질에 의지해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오염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진여는 본래 그릇된 생각에 의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차별적인 모습이 없는데도 진여의 무량한 공덕의 모습을 말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설명해 보자. 일체의 현상은 본래 오직 마음이 움직여서 나타난 것이라서 실상에는 그릇된 생각이 없다.

그러나 아뢰야식의 생멸심에서 인식주관이 발생하면서 깨닫지 못한 상태가 된다. 다시 깨닫지 못한 상태의 인식주관은 인식대상을 분별해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릇된 생각이 없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온 우주를 차별없이 비추는 대지혜광명인 것이다. 만일 마음이 인식주관을 일으킨다면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을 보게 되지만 마음이 인식주관을 떠나버리면 바로 온 우주를 두루 평등하게 관조할 수 있다.

마음이 움직이면 진실로 아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드러나는 현상은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서 생멸의 인연을 따르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현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사유하고,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사유하고, 실체가 없는 허상을 실체가 있는 실상이라고 사유하고, 더러움을 깨끗하다고 잘못 알아서 들 끊는 번뇌 망상으로 인하여 속박되고, 항하의 모래수보다 많은 그릇된 생각을 갖게 된다. 반대로 움직이는 마음을 돌이켜서 움직이지 않게 되면 항하의 모래수보다 깨끗한 공덕의 모양이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다.진여는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망념의 차별적인 모습이 없지만 진여일심이 요동하면 항하사와 같은 망념의 모습이 있으므로 이를 반대로 돌이켜 요동하지 않는다면 항하사를 능가하는 모든 정법의 공덕상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마음을 움직여서 그릇된 관념과 생각으로 눈앞의 현상을 다시 본다면 보여 지는 현상은 여전히 불완전한 허상일 뿐이다.

맑고 깨끗한 진여의 본질과 그 본질이 현상으로 드러난 무량한 공덕의 실상은 바로 한마음이다. 그릇된 생각으로 분별할 만한 인식대상의 세계가 없이 온통 한마음으로 온 우주에 두루 채워진 것을 여래의 몸이라 하고 여래를 저장하고 있는 여래장이라고 한다.

 

설명

여기서는 본래 깨달은 마음인 진여의 본질과 그 본질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진여의 본질이 맑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불변하고 증감이 없기 때문에 중생과 부처가 본래 한마음이고 평등하다. 왜냐하면 중생의 내면에 있는 진여나 부처의 내면에 있는 진여나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생과 부처가 다른 것은 작용적 · 현상적 측면이다. 즉 부처의 마음은 무명이 없기 때문에 주객을 분별하는 그릇된 관념과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부처의 마음에는 를 차별하는 그릇된 관념과 생각이 없기 때문에 진여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수한 공덕의 실상들로 드러난다. 반면에 중생의 마음은 주객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릇된 관념이 만들어낸 심상인 허상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관념과 편견이 비어버린 부처의 마음은 본래 마음인 진여와 일치하지만 온갖 그릇된 관념과 편견, 생각, 심상들로 채워진 중생의 마음은 본래 마음인 진여와 일치하지 않는다.

위에서 마음이 움직인다는 의미는 오감각과 정서, 사고, 기억이 움직이고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과 정서, 사고, 기억이 움직이고 작동한다는 것은 곧 이들이 과거 경험과 기억이라고 하는 프리즘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눈앞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못한다는 말이다.

부처의 마음은 탐진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잔잔하고 맑은 호수처럼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비춘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은 탐진치로 인해서 온갖 감정, 감각, 생각들이 파도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비추지 못하고 오해하고 착각한다.

 

7, 진여의 작용

 

復次眞如用者 所謂諸佛如來 本在因地 發大慈悲 修諸波羅密 攝化衆生 立大誓願 盡欲度脫等衆生界 亦不限劫數 盡於未來 以取一切衆生 如己身故 而亦不取衆生相 此以何義 謂如實知一切衆生及與已身 眞如平等無別異故 以有如是大方便智 除滅無明 見本法身 自然而有不思議業種種之用 卽與眞如等徧一切處 又亦無有用相可得 何以故 謂諸佛如來 唯是法身智相之身 第一義諦 無有世諦境界 離於施作 但隨衆生見聞得益 故說爲用

진여의 작용은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수행의 과정에서 대자비의 원력을 일으켜서 모든 바라밀을 닦고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크나큰 서원사홍사원, 아미타불의 48, 약사여래의 12대원 등.을 세우고 모든 중생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시간제한 없이 영원토롤 계속 노력한다. 그들은 모든 중생 돌보기를 자기 몸과 똑같이 여기면서도 중생의 생각이나 관념을 취하지 않는다. 무슨 뜻이냐 하면 중생 안에 있는 진여나 자신 안에 있는 진여나 모두 평등하여 차이가 없음을 완전하게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와 여래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무수한 수단과 방법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으로 나아가 무명을 모두 소멸하고 진리의 몸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불가사의한 여러 가지 작용을 갖는 것이다.

진여의 작용은 진여와 마찬가지로 온 우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지만 작용한다는 의식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망상의 분별이 끊어지고 오직 진리의 몸으로 분별된 절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객을 분별하는 세속적인 인식대상이 아니라서 일체의 인위적 작용이 없다. 다만 중생이 과거 세세생생보고 들은 주순에 맞추어서 깨달음으로 이끌고 이익되게하기 때문에 작용이라 말하는 것이다.

 

설명

중생은 자기 내면에 진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에 가려서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무지를 완전히 제거하여 깨달음을 얻은 모든 부처와 여래가 그런 중생을 가엾이 여겨서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부처와 여래가 되기 이전에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깨달음을 얻어서 일체의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겠다고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진여의 작용은 무지에 가려져 있는 중생의 진여가 아니라 무지가 전혀 없이 진여 자체만으로 머무르는 부처와 여래의 진여가 중생의 깨달음을 위해서 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와 여래는 중생의 깨달음을 위해서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중생 안에 있는 진여가 자기와 완전하게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중행과 자신을 차별하지 않는다. 다만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무지의 정도에 따라서 그 수준에 맞게 작용하여 무지를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도록 도울 뿐이다.

 

8, 범부와 보살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진여

 

此用有二種 云何爲二 一者依分別事識 凡夫二乘心所見者 名爲應身以不知轉識現故 見從外來 取色分齊 不能盡知故 二者依於業識 謂者菩薩從初發意乃至菩殺究竟地心所見者 明爲報身 身有無量色 色有無量相 相有無量好 所住依果亦有無量種種莊嚴 隨所示現 卽無有邊 不可窮盡 離分齊相 隨其所應 常能住持 不毁不失 如是功德 皆因諸波羅密等無漏行熏 及不思議熏之所成就 具足無量樂相 故說爲報身 又爲凡夫所見者 是其麤色 隨於六道各見不同 種種異類 非受樂相 故說爲應身 復次初發意菩薩等所見者 以深信眞如法故 少分而見 知彼色相莊嚴等事 無來無去 離於分齊 唯依心現 不離眞如 然此菩薩猶自分別 以未入法身位故 若得淨心 所見微妙 其用轉勝 乃至菩薩地盡 見之究竟 若離業識 則無見相 以諸佛法身 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 問曰 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 云何能現色相 答曰 卽此法身是色體故 能現於色所謂從本已來 色心不二 以色性卽智故 色體無形 說名智身 以智性卽色故 說名法身徧一切處 所現之色無有分齊 隨心能示十方世界 無量菩薩 無量報身 無量莊嚴 各各差別 皆無分齊 而不相妨 此非心識分別能知 以眞如自在用義故

진여의 작용에는 주 종류가 있다.

첫째는 범부와 이승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경우다. 일체 현상을 오감각과 의식의 수준에서 분별하고 판단하는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여지는 진여의 작용을 응신이라 이름한다. 이들은 모든 현상이 오직 마음이 움직여서 발생한 인식주관이 만들어 낸 허상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상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생각과 관념에 이름을 붙이고 이미지와 형태를 취함으로써 제대로 알지 못하고 된다.

둘째는 초발의 보살로부터 보살구경지에 이르는 모든 보살의보살수행에서 11~50단계에 해당. 마음에서 작용하는 경우다. 마나식의 수준에서 일체 현상은 오직 마음에 의한 것일 뿐, 드러나 보이는 인식대상은 모두 허상임을 아는 보살의 마음으로 보여지는 진여의 작용을 보신현상의 차별이 진짜 차별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임을 알기 때문에 공간에 구애됨이 없고 훼손하거나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한량없는 즐거운 상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신은 보살의 삼매에서 인식대상을 사라지고 인식주관만 남은 상태에서 나타나 보이는 모습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여전히 인식주관은 남아 있는 상태다.이라고 한다. 보신은 무수히 다양한 형태와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그 모양은 잘 생기고 훌륭한 용모이며 땅이나 집, 옷 등 갖가지로 장엄하며, 곳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 끝이 없고 없어지지 않으며 한계가 없다.

차별적인 모양이 없이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서 무궁무진하여 훼손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은 공덕과 복락은 모두 십바라밀 등의 번뇌에 물들지 않는 법을 수행해서 익히고 안으로는 불가사의한 진여를 익힘으로써 한량없는 즐거운 공덕의 모습을 빠짐없이 갖추었기 때문에 보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범부에게 보여지는 진여는 감각 수준에서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그러므로 육도중생이 각자 보는 수준이 달라서 진여가 보여지는 모습 또한 같지 않다. 깨달음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경지에서 보여지는 즐거운 모습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수준과 상태에 따라서 반영되는 차별적인 모습을 보기 때문에 응신이라고 말한다.응신(應身)은 중생이 자기 수준으로 지각하고 반영하여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의미다. 이를테면 지옥중생이 보는 부처님의 모습은 무시무시하고 무서운 상이다.

그러나 초발의 보살 등이 보는 것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작게나마 부분적으로 보신을 본다. 그리고 보여지는 보신의 모양과 형태와 장식 등의 것들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 차별을 떠났으며 오직 마음에 의하여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은 것임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인식주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분별하므로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며 아직 법신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다. 만약 인식주관이 사라져서 주객을 분별하는 오염된 마음이 사라지고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얻게 되면 미묘한 관찰과 뛰어난 작용으로 점차 보살로서의 모든 수행을 완성한 50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때에는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만약 마나식이 사라지면 보고 보여지는 것이 또한 없어진다. 이때부터는 모든 부처의 법신의 모양과 형태가 사라진다. 왜야하면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부처의 법신이 모양과 형태가 없다면 어떻게 응신, 보신과 같은 모양과 형태를 나타낼 수 있는가? 법신은 모양의 본체이기 때문에 모양을 나타낼 수 있다. 본래부터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과 마음이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의 본질은 진여이기 때문이다. 모양의 본체인 진여에는 보신이나 화신과 같은 형상이 없는 것을 가리켜 진여의 몸이라고 한다. 진여의 성품이 곧 모양인 까닭으로 법신을 모든 곳에 두루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여는 중행의 마음을 따라 시방세계에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과 무량한 장엄으로 각기 다른 모양을 드러내면서도 진여 자체의 성품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 이러한 작용을 무명에 의해서 움직여진 마음에서 발생한 주객을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무명에 오염되지 않은 진여의 자유자재한 작용이기 때문이다.

 

설명

아이를 교육한 때 어떤 아이는 회초리를 들어야 말을 듣고, 어떤 아이는 칭찬이 필요하고, 또 어떤 아이는 설명하거나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그릇된 관념과 생각을 버리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도 지옥이나 벌 등의 두려움과 고통이 필요한 정신수준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국이나 영생의 가르침이 필요하나 정신수준의 사람이 있기도 하다. 아니면 보다 높은 차원의 본질적인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아이를 때려서 가르칠 것인지 칭찬을 하거나 설명을 해서 가르칠 것인지는 부모나 교사가 가지고 있는 관념, 생각, 신념에 따라서 의지적으로 결정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와 여래는 교사와 같은 그런 인위적인 의지가 없다. 그러므로 부처와 여래는 모든 중생을 차별 없이 대하지만 중생의 수준에 제각각이라서 부처와 여래의 자비와 지혜를 받아들이는 모양이 다르고 깨달음의 정도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태양이 온 우주를 차별 없이 비추는데, 산과 계곡과 나무와 땅들이 저마다 생김새가 달라서 빛을 더 받기도 하고 덜 받기도 하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태양이 빛을 발해서 모든 생명을 자라게 하고자 하는 인위적 노력이 없듯이 부처와 여래 또한 중행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는 의지적 노력이 없이 일체중생을 골고루 보살핀다. 다만 중생의 정신수준이 을 주객으로 분별하고 차별하는 범부와 성문 · 연각의 마음이냐, 아니면 적어도 의식수준에서는 주객을 벗어난 보살의 마음이냐에 따라서 부처와 여래를 체험하는 정도가 달라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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