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행 스님법어

6장 생사에서 열반으로

혜주 慧柱 2022. 3. 5. 09:02

 

復次顯示從生滅門卽入眞如門 所謂推求五陰色之與心 六塵境界 畢竟無念 以心無形相 十方求之終不可得 如人迷故 謂東爲西 方實不轉 衆生亦爾 無明迷故 謂心爲念 心實不動 若能觀察知心無念 卽得隨順入眞如門故

여기서는 생사윤회하는 마음의 세계에서 생사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로를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우선 중생을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인간을 특징하는 5단계의 인식과정: 1)()-감각작용으로 차별되고 분별된 대상 2)()-차별된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함으로써 갖게 되는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느낌을 갖는 정서작용 3)()-대상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짓는 사고작용 4)()-그에 따라서 의도하고 지향하는 의지작용과 의지적 욕구 5)()-식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작용들의 형태와 마음을색은 오온 가운데 첫 번째인 색을 말하고 마음은 나머지 수상행식을 지칭한다. 찾아서 들어가 보면 마음작용을 따라서 일어난 모양, 소리, , 촉감, 뜻의 6가지 인식대상을 아무리 잘게 부수어도 그 속에는 마음이 들어있지 않다.

또 마음도 형상이 없는지라 시방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마음의 모양은 찾을 수가 없다. 마치 방향을 모르는 사람이 동쪽을 서쪽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서쪽이 동쪽으로 바뀌지 않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중생도 무명으로 미혹해져서 마음이 바로 그릇된 관념이고 생각인 줄로 착각하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진실된 마음은 무념이고 부동이다. 움직이는 것은 생각, 관념이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은 생각이 없는 무념이라는 사실을 잘 관찰해서 알면 곧 순리를 따라서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 그릇된 집착을 고쳐서 바로잡음

 

對治邪執者 一切邪執皆依我見 若離於我 則無邪執 是我見有二種 云何爲二 一者人我見 二者法我見

모든 그릇된 집착은 나의 생각과 견해로부터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를 버리면 그릇된 집착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나의 잘못된 견해와 생각에는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이 있는데, 인아견은 전체 현상을 주재하는 자기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고, 법아견은 모든 현상에는 영원불변하는 독립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1, 범부들의 그릇된 견해

 

人我見者 依諸凡夫說有五種 云何爲五 一者聞脩多羅說 如來法身 畢竟寂寞 猶如虛空 以不知爲破著故 卽謂虛空是如來性 云何對治 明虛空相是其妄法 體無不實 以對色故有 是可見相令心生滅 以一切色法本來是心 實無外色 若無外色者 則無虛空之相 所謂一切境界 唯心妄起故有 若心離於妄動 則一切境界滅 唯一眞心無所不徧 此謂如來廣大性智究竟之義 非如虛空相故 二者聞脩多羅說 世間諸法畢竟體空 乃至涅槃眞如之法亦畢竟空 從本已來自空 離一切相 以不知爲破著故 卽謂眞如涅槃之性唯是其空 云何對治 明眞如法身自體不空 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聞多羅說 如來之藏無有增減 體備一切功德之法 以不解故 卽謂如來之藏有色心法自相差別 云何對治 以唯依眞如義說故 因生感染義示現說差別故 四者聞脩多羅說 一切世間生死染法 皆依如來藏而有 一切諸法不離眞如 以不解故 謂如來藏自體具有 一切世間生死等法 云何對治 以如來藏從本已來 唯有過恒沙等諸淨功德 不離不斷 不異眞如義故 以過恒沙等煩惱染法 唯是妄有 性自本無 從無始世來未曾與如來藏相應故 若如來藏體有妄法 而使證會永息妄者 則無是處故 五者聞脩多羅說 依如來藏故有生死 依如來藏故得涅槃 以不解故 謂衆生有始 以見始故 復謂如來所得涅槃有其終盡 還作衆生 云何對治 以如來藏無前際故 無明之相亦無有始 若說三界外更有衆生始起者 卽是外道經說 又如來藏無有後際 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 則無後際故

인아견은 모든 범부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경에서 여래법신이 끝내는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이 여래법신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고 허공이 바로 여래의 성품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은 어떻게 바로잡아야 되는가? 허공의 모양은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생각과 관념으로 정의되어질 수 있는 허공이라는 개념을 모양과 형태로 비유해서 마치 허공의 모양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말로써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음이 생멸하는 것이다.마음은 원래 불생불멸인데 마음 안에 생가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 실제로는 생각이 생멸하는 것이다. 생각과 관념이 만들어 낸 모든 관념적 이미지와 모양은 허상이고 그것은 마음 안에 존재하는 심리적 · 인식론적 존재일 뿐, 마음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 감각적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정의된 허공의 모양은 없는 것이다. 모든 관념적 · 인식적 대상은 생각이 만들어 낸 심상이기 때문에 그릇된 생각을 버리면 일체의 심상도 사라지게 된다. 일체의 심상이 사라지고 나면 오직 하나의 진실된 마음이 온 우주에 두루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래의 광대무변한 지혜의 성품이고 최상의 경지라는 것이지 허공의 모양이 곧 여래의 성품이라는 뜻이 아니다.

두 번째는 경에서 세속의 모든 관념들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이고 심지어 열반이나 진여도 종국에는 공한지라 본래부터 본질이 공해서 어떤 모양도 없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열반과 진여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고 진여와 열반의 본질이 오직 공이라 여긴다. 이것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 진여법신 자체가 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왜냐하면 진여의 본체는 공하지만 그 진여본체의 작용인 진여법신은 모든 중생의 깨달음과 이익을 위해서 한량없는 성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경에서 여래장은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이 여래장 자체에 일체의 공덕을 갖추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이 여래장에 대한 믿음과 이해를 가져오게 하려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여래장 안에는 공덕의 형태와 여래장 자체인 진여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차별적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어떻게 고쳐서 바로잡아야 하는가? 여래장 자체에 일체의 공덕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진여의 본체와 작용의 관계를 비유해서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여래장의 본체와 그 작용인 공덕상은 서로 독립적인 별개가 아니라 본질과 그 본질의 작용 관계와 같은 것이다. 게다가 일체의 공덕이라고 말함으로써 공덕의 차이와 다양성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 다양성과 차이라는 것이 여래장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진여의 작용처럼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네 번째는 경에서 세속의 생사윤회하는 모든 오염된 인식대상들이 다 여래장에 의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들은 진여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고 여래장 자체에 세간의 생사윤회하는 모든 성질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고 여긴다. 어떻게 고쳐서 바로잡아야 하는가? 여래장에는 오직 원해부터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모든 청정한 공덕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여래장은 진여와 분리되거나 단절된 것이 아니며 진여와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여래장이 바로 진여와 같다는 의미다.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번뇌로 오염된 관념은 오직 허망한 마음이 요리조리 생각하고 계산해서 만들어낸 심상으로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다. 여래장의 본질에는 본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만일 여래장의 본체에 정말로 그와 같은 허상이 있다면 진여를 깨달아서 그릇된 마음을 영원히 소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섯 번째는 경에서 여래장에 의해서 생사도 있고 열반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래장에 의해서 생사가 있다.’라는 말에서, 여래장이 먼저 있고 생사가 나중에 있다고 받아들여서 중생의 생사법은 시작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생의 생사법의 시작이 여래장이라고 받아들인다.

생사도 있고 열반도 얻을 수 있다.’는 말에서, 생사가 먼저 있고 열반이 나중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래가 얻은 열반은 끝이 있기 때문에 열반이 끝나면 다시 중생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고쳐서 바로잡아야 하는가?

여래장은 시간적으로 시초가 없기 때문에 여래장을 의지해서 일어난 생사의 무명도 역시 시작이 없다. 만일 무명으로 인해서 발생되는 삼계를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대를 세 단계로 나눈 것: (1)욕계(欲界)-탐욕이 들끓는 세계로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육욕천을 말함. (2)색계(色界)-탐욕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모양과 형태에 얽매여 있는 세계로 17천이 있음. (3)무색계(無色界)-형상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선정의 세계로 공무변천 · 식무변천 · 무소유천 · 비상비비상천을 말함. 벗어나서 중생이 시작된다고 하는 자가 있으면 그것은 외도의 경전에서 말한 것이다. 또 여래장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가 얻은 열반이 바로 여래장과 일치하기 때문에 끝이 없는 것이다.

 

설명

인식주관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집착을 지닌 범부가 불법의 말씀을 듣고 오감과 의식 수준에서 분별하여 잘못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에 대한 집착을 떠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하지 못하고 그릇된 관념으로 말 자체에 집착하여 원래 의도한 의미를 자기중심적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이를테면 마음의 본체인 진여를 공()의 개념으로 설명하여 허공에 비유하면 범부는 허공의 모양을 생각한다.

그래서 속이 텅 빈 모양을 생각하고 그야말로 마음의 본체는 아무 것도 없는 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진여가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어서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끝없이 무한하고 광대해서 무엇이든지 무한히 수용할 수 있는 허공의 작용과 같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또 오감각의 수준에서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진여가 색깔이 없고 맛이 없고 모양이 없고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는다고 하면 그들의 정신수준을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사고의 틀 안에 집어넣어서 진리를 왜곡시켜버리고 만다.

 

 

2, 성문 · 연각승의 그릇된 견해

 

法我見者 依二乘純根故 如來但爲說人無我 以說不究竟 見有五陰生滅之法 怖畏生死 妄取涅槃 云何對治 以五陰法自性不生 則無有滅 本來涅槃故

성문과 연각승의 이해 수준은 아직 일체의 정신적 ·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으며 허상이라는 깨달음의 최고 경지인 법무아(法無我)를 이해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다만 인무아(人無我)만을 설명하셨다.

그래서 성문과 연각승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가 생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열반이 실체를 가지고 있는 실상인 중 알고 열반을 얻으려고 집착한다. 이것을 어떻게 고쳐서 바로잡아야 하는가? 다섯 가지 요소[色受想行識]의 본질이 바로 진여이고 열반이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다.

 

설명

우리가 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어야겠다는 마음을 내는 가장 일차적인 동기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고달프기 때문이다. 또 현실을 싫어하고 현실에 염증을 낸 나머지 뭔가 좀 더 깨끗하고 순수한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 존재가 무상하고 허망하여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깨달음의 세계를 갈구하게 된다.

그 결과 깨달음의 세계가 이 현실세계와는 다른 곳에 실제로 공간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집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속세를 미워하고 싫어해서 현실을 더럽고 지저분한 세상이며, 열반은 깨끗하고 순수하다고 좋아해서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을 좋아하고 집착해서 얻고자 하는 것과 열반을 향해서 깨달아 나아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전자는 열반과 현실을 이원적으로 분별해서 좋아하고 싫어함으로써 또 다른 고통과 번뇌를 만드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서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돈을 벌려고 집을 나갔던 아버지가 돈을 벌어서 돌아오는데 자기 집이 화재가 나서 불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집안에서는 아이들이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불이 났으니 빨리 문 밖으로 나가자고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서 너희들에게 주려고 아주 좋은 선물들을 샀는데 지금 마당에 있다고 유인작전을 폈다. 그랬더니 귀가 솔깃해진 아이들이 노는 것을 멈추고 일제히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그런데 막상 마당에 나가 보니 아버지가 말했던 선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버지가 말한 선물이 어디에 있느냐고 불평을 하다가 마침 불길이 점점 커져서 집이 무섭게 활활 타는 모습과 잿더미로 변해가는 모양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제 서야 아이들은 아버지가 자기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아버지가 말했던 선물은 진짜가 아니라 자기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방편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열반은 선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마음 수행을 하는 우리들은 선물을 향해서 불타는 집을 뛰쳐나오는 아이들처럼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 아이들인가? 집에 불이 나서 빨리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면 타서 죽게 된다는 사실도 모르고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인가. 아니면 멋진 선물을 받기 위해서 마당으로 뛰어 나오고 있는 아이들인가. 선물이 어디에 있느냐고 불평하는 아이들인가. 불타는 집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인가.

 

 

세속과 열반의 상대성

 

復次究竟離妄執者 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 無有自相可說

그릇된 집착을 끝까지 완전하게 버린다는 것은 더러운 세속과 깨끗한 열반이 서로 상대를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과 열반은 둘 다 독립적이고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상이 아니다.

 

설명

마음 수행을 하다보면 실천보다 생각이 앞서가기가 쉽다. 또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치게 간절하고 급해지면 깨달음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은연중에 열반의 세계가 세속과 별도로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열반은 무지하고 오염된 마음의 세계인 속세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지혜와 깨끗함을 설명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1, 불가설의 진리

 

是故一切法從本已來 非色非心 非智非識 非有非無 畢竟不可說相

그러므로 모든 진리는 본래부터 물질적인 형태도 아니고 정신적인 개념조 아니다. 지혜도 아니고 앎도 아니다. 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본질이나 특징을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

우리는 진리를 설명할 때, 감각적으로는 형태, 모양, 색깔, , 냄새, 촉감 등의 개념을 사용하고 사고적으로는 옳고 그르고, 성스럽고 속되고, 보다 더 위대하고 절대적이고 본질적이다는 등의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명일 뿐 그것이 진리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감각적 · 인지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적 · 인지적 설명으로 이해되어지는 관념적 지혜나 앎도 진리가 아니다. 또 관념적 지혜나 앎으로써 있다고 설명되고 없다고 설명되어지는 것이 진리가 아니다.

금강경에서 설해지고 있듯이 진리는 가히 말로써 규정짓거나 설명되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진리 자체는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는가?

그건 지금까지 앞에서 설명했듯이 진여는 주객 분별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객을 분별하고 차별화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고 진리에 역행하는 것인데 진리를 말로써 개념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진리를 인식대상으로 삼고 분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와 깨달음을 설명하는 데 직지인심(直指人心),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2, 불가설을 설하는 취지

 

而有言說者 當知如來善巧方便 假以言說引導衆生 其旨趣者 皆爲離念歸於眞如 以念一切法令心生滅 不入實智故

말로써 설명한 수 없는 진리를 설명하는 까닭은 여래가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가리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진 언어와 말에 매달려서 정말로 설명하고자 하는 진짜 의도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진짜 의도는 그릇된 관념과 생각을 버리고 깨달음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세속이든 열반이든 잘못 알고 집착하면 그 마음이 생멸변화하기 때문에 진정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한다.

 

설명

깨달음을 향해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종종 두 가지 오류를 범하는 이들이 있다. 하나는 진리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다는 그 말에 매달려서 무조건 책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무지하고 논리성과 체계성이 떨어진다. 그 결과 불법의 포교와 발전, 성장을 저해한다.

두 번째 오류는 불법을 공부하고 설명하는 궁극적 목적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의 일부나 특정 표현에 집착해서 그것을 근거로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고집한다. 이를테면 경, , 론 삼장은 모두 깨달음을 향해가는 수단으로서 설해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시대와 상황을 무시한 채 남녀를 차별하거나 수행방법의 우열을 차별한다.

여기서는 불법의 모든 가르침은 한결같이 깨달음을 향하도록 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지 그 가르침 자체에 매달여서 논쟁하거나 그것으로 인한 편견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

分別發趣道相者 謂一切諸佛所證之道 一切菩薩發心修行趣向義故 略說發心有三種 云何爲三 一者信成就發心 二者解行發心 三者證發心

모든 보살이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부처님이 깨달은 도의 길로 나아가는 데는 대략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믿음을 성취한 단계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경우고,깨달음을 향한 보살의 52단계 수행에서 믿음의 단계인 처음 10단계를 모두 닦아서 성취하고 11단계에 있는 경우다. 산란한 마음을 멈추는 3가지 마음상태(모든 현상은 공이라고 체득하여 망상을 멈춤,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는 현상을 긍정하고 인연에 따르면서 안주함. 공에 치우치거나 인연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에 머무름)를 개발되고 오안(가려진 것을 보지 못하는 범부의 육신에 갖추어진 육안, 겉모습만 보고 그 본성은 보지 못하는 욕계 색계의 천인이 갖추고 있는 눈, 현상의 이치는 보지만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성문 연각의 눈, 모든 현상의 참모습과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을 두루 아는 보살의 눈,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이 개발된다. 둘째는 믿음을 이해해서 실천하는 단계에서 마음을 일으킨 경우고,30단계까지 닦아서 성취하고 31단계에 있다. 법공을 잘 알고 법계의 순리를 거슬리지 않고 육바라밀을 닦아서 육도를 윤회하는 행위가 순결해지고 성숙된다. 셋째는 깨달음을 얻는 단계에서 마음을 일으키는 경우다.앞의 두 과정을 거치면서 40단계까지 닦고 41단계에서 50단계에 있다. 법신을 증득하여 진심을 일으킨다.

인식주관이 인식대상에 대해 일으키는 6가지 작용(분별, 상속, 집착, 계명자상, 이름에 집착해서 그릇된 행위를 일으킴. 그릇된 행위에 얽매여 괴로움의 과보를 받음)이 타파되고 진여의 작용이 발기했다.

 

1, 믿음의 단계에서 발심

 

(1) 수행대상

信成就發心者 依何等人 修何等行 得信成就 堪能發心 所謂依不定聚衆生 有熏習善根力故 信業果報 能起十善 壓生死苦 欲求無上菩提 得値諸佛 親承供養 修行信心 經一萬劫 信心成就故 諸佛菩薩敎令發心 或以大悲故 能自發心 或因正法欲滅 以護法因緣 能自發心 如是信心成就得發心者 入正定聚 畢竟不退 名住如來種中 正因相應 若有衆生善根微少 久遠已來煩惱深厚 雖値於佛亦得供養 然起人天種子 或起二乘種子 設有求大乘者 根則不定 若進若退 或有供養諸佛未經一萬劫 於中遇緣亦有發心 所謂見佛色相而發其心 或因供養衆僧而發其心 或因二乘之人敎令發心 或學他發心 如是等發心 悉皆不定 遇惡因緣 或便退失墮二乘地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를 닦아서 믿음을 얻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가? 발전하고 진보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는지, 아니면 반대로 타락하고 퇴보해서 악도에 떨어질는지 결정이 안 된 중생이다.11단계 이상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 단계와 1단계에도 들어가지 않아서 인과를 믿지 않는 중간에 있는 사람이 발심하여 무상보리를 구하려고 하지만 마음이 아직 완전하게 굳어지지 않아서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서는 심신의 단계다.

이들에게는 밖으로 들어서 익힌 것과 본래 내면으로부터 알던 것을 익히고 전생부터 닦아서 익힌 선의 뿌리가 있어서 업의 과보를 믿고 오계와 심선업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부처를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을 닦는다.

그렇게 일만 겁을 닦아서 신심을 모두 성취했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의 가르침으로 발심을 하거나, 혹은 스스로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서 그들을 돕고자 발심하거나, 아니면 올바른 가르침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올바른 가르침을 보호하려는 인연으로 발심하게 된다. 믿음을 얻어서 발심하게 된 사람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하기 때문에 반드시 성불하기로 결정하고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에 머물러서 바로 부처의 종자가 싹틀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 만약 어떤 중생이 선의 뿌리가 작어서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매우 두텁다면, 비록 부처를 만나 공양하게 되더라도 육도에서 인간계와 천상계의 종자를 일으키고 혹은 성문과 연각의 종자를 일으킨다.수행이 뛰어난 자는 11단계로 진입하고 생사를 두려워하고 생사를 두려워하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떨어지는 자는 대승의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 사홍서원 등을 버리고 소승도를 수행하려 한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근기가 결정되지 아니하여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난다. 또 여러 부처에게 공양함으로써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좋은 인연을 만나서 발심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부처의 외적인 모양과 형태를 보고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이키기도 한다. 혹은 여러 스님에게 공양하는 것으로써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혹은 성문과 연각의 가르침을 통해서 발심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워서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발심들은 모두 확고하지가 않아서 언제든지 나쁜 인연을 만나면 퇴보해서 성문 · 연각의 지위에 떨어지기도 한다.

 

(2) 수행형태

復次信成就發心者 發何等心 略說有三種 云何爲三 一者値心 正念眞如法故 二者深心 樂集一切諸善行故 三者大悲心 欲拔一切衆生苦故 問曰 上說法界一相 佛體無二 何故不唯念眞如 復假求學諸善之行 答曰 譬如大摩尼寶 體性明淨 而有鑛穢之垢 若人雖念寶性 不以方便種種磨治 終無得淨 如是衆生眞如之法體性空淨 而有無量煩惱念垢 若人雖念眞如 不以方便種種熏修 亦無得淨 以垢無量徧一切法故 修一切善行以爲對治 若人修行一切善法 自然歸順眞如法故 略說方便有四種 云何爲四 一者行根本方便 謂觀一切法自性無生 離於妄見 不住生死 觀一切法因緣和合 業果不失 起於大悲 修諸福德 攝化衆生 不住涅槃 以隨順法性無住故 二者能止方便 謂慚愧悔遇 能止一切惡法不令增長 以隨順法性離諸過故 三者發起善根增長方便 謂勤供養禮拜三寶讚歎隨喜 勸請諸佛 以愛敬三寶淳厚心故 信得增長 乃能志求無上之道 又因佛法僧力所護故 能消業障善根不退 以隨順法性離癡障故 四者大願平等方便 所謂發願盡於未來 化度一切衆生使無有餘皆令究竟 無餘涅槃 以隨順法性無斷絶故 法性廣大 徧一切衆生 平等無二 不念彼此 究竟寂滅故

믿음을 성취하는 발심수행의 형태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진여법을 올바로 생각하고 극단으로 치우침이 없는 곧은 마음이다.자리행과 이타행의 근본이다.

둘째는 일체의 모든 선행을 즐겨하는 사려 깊은 마음이다. 셋째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대비심이다.

그런데 앞에서 일체 우주 현상은 하나의 진여이고 깨달음의 본체는 우주 현상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본질과 현상은 서로 상대적인 두 모습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오직 진여만 생각하면 되지 다시 모든 선행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가?

비유컨대 큰 마니보가 본질은 맑고 깨끗한 것이지만 거친 광석의 때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사람의 마니보의 깨끗한 본질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해서 갈고 다듬지 않는다면 마니보의 깨끗한 모습을 실제로 얻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진여도 그 본체는 깨끗하지만 엄청난 번뇌의 더러운 때가 끼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자기 안에 진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더라도 수행을 통해서 닦고 익히지 않으면 실제로 깨끗해 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때가 끝이 없어서 모든 현상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닦아서 고치고 바로잡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모든 선행을 수행하면 저절로 본래 성품인 진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모든 선행을 수행하면 방법에는 대략 네 종류가 있다.

첫째 모든 현상은 본질적으로 없던 것이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현상이 생멸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버림으로써 생사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정신적 · 물질적 현상은 원인과 조건이 합해져서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고통하는 것을 보고 대비심을 일으켜서 복과 덕을 닦아서 중생을 거두어 가르치고 변화시키면서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다. 이는 우주 만물에 내재된 본질과 또 그 본질이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모양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관계처럼 생사 윤회하는 현실에도 집착하지 않고 그렇다고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아직 행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는 악은 부끄러워하고 이미 행한 악은 그 허물을 후회함으로써 모든 악을 중지하여 더 이상 자라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여의 본 성품을 따라서 모든 허물을 버리는 수행을 하지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미 일으킨 선행은 닦아서 더욱 자라나게 하고 아직 일으키지 않은 선행은 일으켜서 자라날 수 있도록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불법승 삼보에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찬탄하고 함께 기뻐하며 모든 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삼보를 사랑하면서도 공경하는 순수하고 너그러운 마음 때문이다. 삼보를 믿는 마음이 더욱 자라나야 더없이 높은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두게 된다.

또 불법승의 위신력으로 보호받게 때문에 악업의 장애를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어 자기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깨달음의 성품을 따라서 어리석음의 장애를 버리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가르치고 변화시켜서 구제함으로써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가 번뇌와 욕망이 완전히 끊어진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도록 하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여의 본 성품을 따라서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익히기 때문이다.

광대한 진여의 성품은 모든 중생에게 본질적으로 동일한 모습으로 내재하기 때문에 진여는 서로 다른 별개가 아니다. 따라서 상대방과 자신을 그릇된 생각으로 분별하고 차별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경지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3) 발심의 공덕

菩薩發是心故 則得少分見於法身 以見法身故 隨其願力能現八種利益衆生 所謂從兜率天退 入胎 住胎 出胎 出家 成道 轉法輪 入於涅槃 然是菩薩未名法身 以其過去無量世來有漏之業未能決斷 隨其所生與微苦相應 亦非業繫 以有大願自在力故 如脩多羅中 或說有退墮惡趣者 非其實退 但爲初學菩薩未入正位而懈怠者恐怖 令彼勇猛故 又是菩薩一發心後 遠離怯弱 畢竟不畏墮二乘地 若聞無量無邊阿乘祗劫 勤苦難行乃得涅槃 亦不怯弱 以信知一切法從本已來自涅槃故

보살이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겠다는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나마 여래의 몸을 보게 된다. 보살은 또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원력에 따라서 다음의 여덟 가지로 드러나는 몸을 통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 부처님이 도솔천으로부터 내려와서 모태에 들어가고 모태에 머물고 모태에서 나와서 출가하여 성도하고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팔상성도를 말한다.

그러나 이 보살을 아직 법신보살이라 칭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무한한 과거로부터 번뇌망상에 오염된 업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거기서 생겨나는 미세한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중생의 업보처럼 속박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제도라고 하는 크나큰 원력으로 인해서 자재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이 보살은 중생을 남김없이 교화하겠다는 대원력 때문에 일부러 번뇌의 혹을 남겨 둔 채 업을 따르는 과보를 받으면서 과거세의 업을 결연히 끊지 않는다. 그 때문에 생겨난 미세한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경 가운데서 혹시 이 단계에 있는 보살이 수행에서 물러나 범부의 악도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단계의 보살이 실제로 수행에서 퇴보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처음으로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는 보살이 이 단계의 보살지위에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보살수행에서 11단계. 인식의 대상이 실상이 아니라 허상임을 아는 단계.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용맹하게 정진하도록 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이 단계에 있는 보살은 일단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나면 두려워하거나 약한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성문 · 연각에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끝없이 무한한 세원 동안 어려운 수행을 부지런히 애써 닦아야만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을 듣더라고 겁내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정신적 · 물질적 현상이 본래부터 깨달음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2, 이해와 실천단계에서 발심

 

解行發心者 當知轉勝 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 於第一阿乘祗劫將欲滿故 於眞如法中 深解現前 所修離相 以知法性體無慳貪故 隨順修行檀波羅密 以知法性無染 離五欲過故 隨順修行尸波羅密 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 隨順修行羼提波羅密 以知法性無身心相 離懈怠故 隨順修行毗黎耶波羅密 以知法性常定 體無亂故 隨順修行禪波羅密 以知法性體明 離無明故 隨順修行般若波羅密

이 단계에서의 발심은 앞의 단계에 비해서 더욱 뛰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 있는 보살은 깨달음을 위한 보살수행의 첫 단계부터 30단계를 거쳐서 40단계를 완성하고, 41단계에 이르려고 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있는 보살은 자기 앞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진여의 모습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진여의 이치를 따라서 인식대상에 대한 집착이 없는 수행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진여는 본질적으로 인색하거나 욕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순리를 따라서 보시바라밀을 수행하며 또 진여는 오염되어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에 오욕의재욕, 색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 허물이 없음을 알고 그 순리를 따라서 지계바라밀을 수행한다. 진여는 고통이 없어서 성내고 괴로워함을 버렸기 때문에 그 순리를 따라서 인욕바라밀을 수행한다.

진여는 또한 몸과 마음의 모양이 없으므로 게으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순리를 따라서 정진바라밀을 수행한다. 진여는 항상 안정하고 고요하게 있어서 그 본체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 순리를 따라서 선정바라밀을 수행한다.

진여는 본체가 밝아서 무명을 버린 줄 알기 때문에 그 순리를 따라서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 여기서는 진여의 본질을 따라서 수행하긴 했지만 진여의 이치를 직접 깨달은 것이 아니라 추리해서 관찰한 것이다.

 

설명

믿음의 단계에서 발심한 범부와 성문 · 연각은 모든 현상을 오직 깨끗하고 더럽고 좋고 싫은 차별적인 것으로 본다. 그래서 세속과 열반을 차별하고 열반이 세속과는 다른 어떤 곳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상의 드러난 겉모습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이름과 모양이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의 본질을 이해한 단계에서 발심한 보살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모양을 통해서 현상의 본질을 본다. 그러므로 보살은 모든 다양한 갖가지 차별적인 현상들이 본질적으로는 동일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현상의 본질을 따라 평등성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범부는 사람의 겉모양이나 지위, 학력, 부의 차이를 보고 사람 차체를 차별하지만 보살은 그 사람의 내면의 인격과 진실성을 보고 마음의 본바탕을 본다. 또 범부나 성문 · 연각은 삶과 죽음을 이원적으로 보기 때문에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싫어하지만 보살을 삶과 죽음을 하나로 받아들인다.

 

3, 깨달음의 단계에서 발심

 

證發心者 從淨心地 乃至菩薩究竟地 證何境界 所謂眞如 以依轉識 說爲境界 而此證者無有境界 唯眞如智 名爲法身 是菩薩於一念頃 能至十方無餘世界 供養諸佛 請轉法輪 唯爲開導利益衆生 不依文字 或示超地速成正覺 以爲怯弱衆生故 或說我於無量阿僧祗劫當成佛道 以爲懈慢衆生故 能示如是無數方便 不可思議 而實菩薩種性根等 發心則等 所證亦等 無有超過之法 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祗劫故 但隨衆生世界不同 所見所聞根欲性異 故示所行亦有差別 又是菩薩發心相者 有三種心微細之相 云何爲三 一者眞心 無分別故 二者方便心 自然徧行利益衆生故 三者業識心 微細起滅故

보살수행에서 41~50단계 경지의 발심이다. 여기서 깨닫는 것은 모든 현상의 본질인 진여다. 우리는 보통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표현하지만 이 단계에 있는 보살은 인식과 주관과 객관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은 깨달을 대상이 없다. 인식과 주관과 객관이 마음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깨달음의 대상이 없는 바로 그 상태를 진여의 지혜[]라고 하고 법신이라고 한다.깨닫기 이전부터 원래 자기 안에 있었던 깨달음. 즉 본각(本覺)을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진여이기 때문에 진여와 본각은 같은 것이다. 원래 있었던 깨달음과 수행에서 깨달은 것이 동일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진여라고 부른다. 주관과 객관의 상대성을 버리고 하나가 된 상태다.

이러한 경지에 있는 보살은 한 찰나의 생각 동안에 온 우주 끝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깨달은 자들을 받들어 모시고 그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구한다. 또 중생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이익을 주지만 그가 사용하는 말이나 문자는 진여의 수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중생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뿐이다.

보살은 단계적으로 점차 발전하는 수행과정을 단박에 뛰어넘어서 곧바로 정각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깨달음의 길이 너무나 요원하고 긴 세월의 고행이라는 사실에 겁을 먹는 나약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깨달음을 너무 쉽고 가볍게 여기는 중생들이 게으로고 교만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수준에 맞추어서 각자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보살은 수없이 다양한 수단과 방편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단계에 있는 보살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5가지 뛰어난 능력: 부처의 가르침을 믿는 능력. 힘써 수행하는 능력. 부처님의 가르침을 명심하여 마음을 챙기는 능력. 마음을 한곳에 모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능력. 부처님의 가르침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왜냐하면 다같이 진여를 깨달은 수준에서 발심했기 때문에 발심의 수준이 같고 깨달음의 세계도 똑같은 진여이기 때문이다. 진여의 본질은 절대평등하기 때문에 이 수준을 초월해서 깨달음에 이른 보살이나 단박에 깨달은 보살이나 모두 같은 경지다. 다만 중생의 수준이 다르고 중생이 거주하는 육도의 세계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각기 근기와 욕망과 성품이 달라서 보고 듣는 것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다같이 똑같은 진여를 깨달았고 얻었지만 그들이 이익을 주고자 하는 중생이 처한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다른 방식과 모양으로 나타나 도움을 주고 이익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들의 눈에 보살의 수준과 모양이 다르게 나타나고 다르게 보여주는 것뿐이다.

이 단계의 보살이 일으키는 마음의 형태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분별이 없는 진실된 마음이다.인식의 주관과 객관이 사라졌기 때문에 를 차별하지 않는 무분별의 지혜가 드러나는 마음이다.

둘째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도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상황과 조건에 맞추어서 일어나는 지혜의 마음이다.중생의 수준과 상황에 맞추어서 거기에 맞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는 지혜로서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깨달음의 지혜[後得智]를 말한다.

셋째는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했지 때문에 아뢰야식이 완전하게 고요한 것이 아니라서 무의식의 상태에서 아주 미세하게 생멸하는 마음이 있다.

 

설명

흔히 중생은 자기의 이익과 소원 성취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런데 원하지 않는 결과를 얻게 되면 고통하고 불행해하면서 불보살을 원망한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불보살은 인위적으로 누구에게는 복을 주고 누구에게는 불행을 주지 않는다. 불보살은 모든 생명체들을 골고루 이익되게 빛을 발하는 태양처럼 중생을 평등하게 돌보지만 중생이 각기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빛을 더 받거나 덜 받고 스스로 어둠을 만드는 것이다.

 

4, 보살수행의 완성

 

又是菩薩功德性滿 於色究竟處示一切世間最高大身 謂以一念相應慧無明煩盡 名一切種智 自然而有不思議業 能現十方利益衆生 問曰 虛空無邊故 世界無邊 世界無邊故 衆生無邊 衆生無邊故 心行差別亦復無邊 如是境界 不可分齊 難知難解 若無明斷無有心想 云何能了名一切種智 答曰 一切境界 本來一心 離於想念 以衆生妄見境界 故心有分齊 以妄起想念 不稱法性 故不能決了 諸佛如來離於見想 無所不徧 心眞實故 卽是諸法之性 自體顯照一切妄法 有大智用無量方便 隨諸衆生所應得解 皆能開示種種法義 是故得名 一切種智 又問曰 若諸佛有自然業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 一切衆生 若見其身 若覩神變 若聞其說 無不得利 云何世間多不能見 答曰 諸佛如來法身平等 徧一切處 無有作意故 而說自然 但依衆生心現 衆生心者 猶如於鏡 鏡若有垢 色像不現 如是衆生心若有垢 法身不現故

 

여기서는 보살수행으로서의 수행 과정인 50단계를 완성하고 나서 주객을 벗어난 마음이 고요하고 고요해서 우주 만물이 다 비추어지는 경지다. 온 우주와 하나가 됨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높고 큰 몸이 되었다.깨달음을 완성하고 스스로 온 우주를 받아들여서 우주와 한몸이 되었다는 의미로 자수용신(自受用身)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깨달음과 본래부터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깨달음과 서로 일치함으로써시각이 일심의 근원에 이르러 본각과 일치했다는 의미다. 근본무명이 단번에 사라졌다. 이것을 일체 종지라고 하는데 우주 만물의 개개의 특징과 차이점을 정확하게 모두 아는 지혜라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다양한 모습과 수준으로 존재하는 무수한 중생들을 각각의 수준에 맞추어서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이익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깨달음을 완성하고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그들 각각을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이익되게 한다는 의미로 타수용신(他受用身)이라고 한다.

질문하기를, 끝이 없는 허공 속에는 끝이 없는 세계가 있고 또 그 세계 속에는 끝없는 중생이 있다. 또 그 무수한 중생마다 무수한 마음작용도 역시 끝이 없다. 그와 같이 한계를 모르는 끝도 없는 인식의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무명이 없어지면 주객을 분별하는 인식주관이 사라지고 따라서 인식대상인 심상, 즉 허상도 동시에 사라지고 없어 질 것이다. 그렇다면 알아야 할 인식대상인 심상이 없는데 어떻게 무수한 중생들의 인식작용과 심상을 아는 일체 종지가 있다는 말인가?

모든 인식대상은 원래 주객을 초월한 한마음에서 나왔다. 그런데 중생들이 주객을 분리해서 이원적으로 보기 때문에 보는데 한계가 생기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객을 분별함으로써 그릇된 관념과 심상, 즉 허상을 일으켜서 진여의 본질과 일치하지 않게 되어 끝까지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그릇된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한계가 없어져서 모든 현상을 두루 비추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주객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진실한 본래 마음이고 진리의 본질인 것이다. 이 한마음의 본체는 모든 그릇된 심상과 허상들을 환하게 비추는 대지혜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무수한 방법과 수단으로 모든 중생들이 자신의 수준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현상들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일체 종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약 모든 부처님들이 의식적인 노력 없이 자연적으로 중생의 수준과 상황에 따라서 모든 곳에 나타나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한다면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몸을 봐야 되고 또 신비한 변화를 보거나 그 말씀을 들어서 모두에게 이익이 있어야 될 텐데 어째서 세상에는 부처님을 보지 못하고 그 말씀을 듣지 못하는 중생들이 많은가?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법신은 평등하여 모든 곳에 골고루 비추지만 의식적이거나 인위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 말하는 것이다. 다만 중생들의 마음에 의해서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때가 끼면 형태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에도 때가 끼어서 법신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법신은 거울의 본바탕과 같고 화신은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은 것이라서 중생의 마음에 때가 있으면 법신의 영상인 화신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섭대승론에서는 중생의 마음 깊숙이에 허물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보이지 않는 현상을 깨진 물그릇에 비치는 달의 모습에 비유했다.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몸이 현실 속에 항상 머물러 있다고 하니 어찌된 것인가? 비유하기를 깨진 그릇 속에는 물이 담길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달이 있어도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생도 마음이 고요하게 머물지 못하고 탐진치와 악견, 아만 등의 허물로 가득하기 때문에 실제로 모든 부처님이 존재하지만 중생의 마음속에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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