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 祖 法 寶 壇 經
門人 法海 集
後學 宅成 譯
同學 智首 校
第四 定慧品(제사 정혜품)
師가 示衆云善知識아 我此法門은 以定慧로 爲本이니 大衆은 勿迷하야 言定慧別이어다
定慧는 一體요 不是二니 定是慧體요 慧是定用이라 卽慧之時에 定在慧하고 卽定之時에 慧在定이니 若識此義하면 卽是定慧等學이니라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나의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대중은 미혹하게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혜〉는 일체요 둘이 아니다.
정은 혜의 바탕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니라.
혜가 올바를 때 정이 혜에 있고, 정이 올바를 때 혜가 정에 있다.
만일 이 뜻을 알면 곧 정과 혜를 고루 배우는 것이니라.
諸學道人은 莫言先定發慧하며 先慧發定이 各別이니 作此見者는 法有二相하야 口說善語호대 心中不善이라 空有定慧하야 定慧不等이어니와 若心口俱善하야 內外一種이면 定慧卽等하리라
自悟修行은 不在於諍이니 若諍先後하면 卽同迷人이라 不斷勝負하야 却增我法하야 不離四相이니라
도 배우는 사람들은 정을 먼저 하여 혜를 일으킨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일으킨다하며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견해를 가지는 자는 법에 두 모양을 두어서 입으로 착한 말을 하지만 마음속이 착하지 못하니라.
공연히 정과 혜를 두어서 정과 혜가 같지 않겠지만 만일 마음과 말이 다 선해서 안과 밖이 한 가지면 정과 혜가 곧 평등하리라.
스스로 깨달아 수행함은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일 선후를 다투면 곧 미혹한 사람과 같으며 승부를 끊지 못하고 〈나다〉, 〈진리다〉하는 것만 늘여서 사상(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을 여의지 못하리라.
善知識아 定慧는 猶如何等고 猶如燈光이 有燈卽光이오 無燈卽暗이라 燈是光之體요 光是燈之用이니 名雖有二이나 體本同一인달하야 此定慧法도 亦復如是하니라 師示衆云善知識아
一行三昧者는 於一切處行住坐臥에 常行一直心이 是也니 如淨名經에 云直心이 是道場이요 直心이 是淨土라하시니 莫心行이 諂曲하야 口但說直하며 口說一行三昧하야 不行直心하고 但行直心하야 於一切法에 勿有執著이어다
선지식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하면, 등불과 같아서 등이 있으므로 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곧 어두우니 등은 빛의 본체요, 빛은 등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 있지만, 체는 본래 동일한 것처럼 이 정혜의 법도 그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일행삼매라 하는 것은 어느 곳 어느 때나(행 · 주 · 좌 · 와) 항상 한결같이 곧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니 정명경에 이르시기를 「곧은 마음이 곧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곧 정토다.」하시었듯이 마음과 행동이 아첨하고 바르지 못하여 입으로만 곧음을 말하고 입으로만 일행삼매를 말하며 곧은 마음을 행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곧은 마음만을 행하고 일체 법을 집착하지 말아라.
迷人은 著法相하야 執一行三昧하야 直言坐不動하고 妄不起心이 卽是一行三昧라하나니 作此解者는 卽同無情이라 却是障道因緣이니라
善知識아 道須通流니 何以却滯리오 心不住法하면 道卽通流어니와 心若住法이면 名爲自縛이니 若言坐不動이 是인댄 只如舍利弗이 宴坐林中이라가 却被維摩詰訶니라
善知識아 又有人이 敎坐호대 看心觀靜하야 不動不起하야 從此置功이라하면 迷人이 不會하고 便執成顚하야 如此者가 衆하니 如是相敎일새 故知大錯이로다
미혹한 법상(法相)에 빠져서 일행삼매에 집착하여 말하기를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령되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일행삼매라 하는데, 이런 견해를 내는 것은 곧 생명이 없는 것과 같으며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되느니라.
선지식! 도는 모름지기 통하고 흐르게 하여야 하는데 어찌 도리어 막히게 하겠느냐.
마음이 법에 머무르지 아니하면 도가 통하여 흐르지만 마음이 만일 법에 머무르면 스스로를 얽어매는 것이 되느니라. 만일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면 사리불이 숲 속에 고요히 앉아 있다가 도리어 유마힐의 꾸짓음을 당한 것과 같으니라.
선지식아! 또 어떤 사람이 앉아서 마음을 보고 고요함을 관해서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아니하는 이것으로 공부를 삼는다고 하면, 미혹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문득 빠져서 바꾸어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자가 많고 이와 같이 서로 가르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師示衆云 善知識아 本來正敎는 無有頓漸이언마는 人性이 自有利鈍일새 迷人은 漸契하고 悟人은 頓修하야 自識本心하며 自見本性하야 卽無差別이니 所以로 立頓漸之假名이니라 善知識아 我此法門은 從上以來로 先立無念爲宗하고 無相爲體하고 無住爲本이니
無相者는 於相而離相이오 無念者는 於念而無念이오 無住者는 人之本性이 於世間善惡好醜와 乃至寃之與親과 言語觸刺欺爭之時에 竝將爲空하야 不思酬害하야 念念之中에 不思前境이니
선지식아!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지마는 사람의 성품이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어서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깨닫게 되고 영리한 사람은 단번에 닦아 스스로 본심을 깨달으며 스스로 본성을 보는 것이니 곧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과 점이라는 거짓이름을 세운 것이니라.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따라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는다.
무상이라는 것은 상에 대하여 상을 여의는 것이고, 무념이라는 것은 생각에 대하여 생각이 없는 것이고, 무주라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세간의 선악과 밉고 고움과 원수와 친한이와 또 말로 주고받고 찌르고 속이고 다툴 때에도 모두 〈공〉한 것으로 여겨서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 생각하는 가운데 앞 경계를 생각지 않는 것이다.
若前念今念後念이 念念相續不斷하면 名爲繫縛이오 於諸法上에 念念不住하면 卽無縛也니 此是以無住로 爲本이니라
善知識아 外離一切相이 名爲無相이라 能離於相하면 卽法體淸淨어니 此是以無相으로 爲體니라
善知識아 於諸境上에 心不染曰無念이라 於自念上에 常離諸境하여 不於境上에 生心이니 若只百物을 不思하야 念盡際却인댄 一念이 絶하면 卽死하야 別處受生하리니 是爲大錯이라
만일 앞생각과 지금 생각과 뒷생각이 생각마다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으면 얽매임이라 하고
모든 법에 대하여 생각 생각이 머무르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무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니라.
선지식아! 밖으로 일체의 상을 여의면 무상이라 한다. 능히 상을 여의면 곧 법체(法體)가 청정해지는데 이것이 곧 무상으로써 체를 삼는 것이니라.
선지식아! 모든 경계 위에 마음이 물들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는데 자기 생각 위에 항상 모든 경계를 여의어서 경계 위에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만일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모든 생각을 다 없애려고만 한다면 한 생각이 끊어질 때, 곧 죽는 것이어서 다른 곳에 몸을 받아 나리니, 이것은 크게 잘 못된 것이다.
學道者는 思之어다 若不識法意인댄 自錯은 猶可이니라 更勸他人하야 自迷不見하고 又謗佛經할댄 所以로 立無念爲宗이니라
善知識아 云何立無念爲宗고 只緣口說見性이니 迷人은 於境上에 有念하고 念上에 便起邪見하야 一切塵勞妄想이 從此而生이라 自性이 本無一法可得이어늘 若有所得하야 妄說禍福하면 卽是塵勞邪見이니 故此法門은 立無念爲宗이니라
도를 배우는 자는 잘 생각하여라.
만일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신을 그르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다시 다른 사람에게까지 권해서 미혹하여 보지 못하게 하며 또 불경을 비방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 것이니라.
선지식아! 어떤 것을 무념을 세워서 종으로 삼는다 하는가? 입으로만 성품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 때문에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이 있고 생각 위에 문득 사견을 일으키는데 일체의 진로 망상이 이로부터 생겨나느니라.
자성은 본래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다.
만일 얻을 것이 있다하여 망령되이 화와 복을 말한다면 이것이 곧 번뇌며 삿된 소견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 종으로 삼는 것이다.
善知識아 無者는 無何事며 念者는 念何物고 無者는 無二相이니 無諸塵勞之心이오 念者는 念眞如本性이니 眞如는 卽是念之體요 念은 卽是眞如之用이라 眞如自性이 起念이오 非眼耳鼻舌이 能念이니 眞如有性일새 所以로 起念이어나와 眞如若無하면 眼耳色聲當時卽壞니라 善知識아 眞如自性이 起念일새 六根이 雖有見聞覺知나 不染萬境하고 而眞性이 常自在니 故로 云能善分別諸法相호대 於第一義에 而不動이라하시니라
선지식아! 〈무〉라는 것은 무슨 일이 없다는 것이며 〈념〉이라는 것은 무슨 물건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무라는 것은 두 가지 상이 없는 것이니 모든 번거로운 망상이 없는 것이며, 염이라는 것은 진여 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진여(眞如)는 곧 생각의 체요, 생각은 곧 진여의 용(用)이니라.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지, 눈 · 귀 · 코 · 혀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라.
진여가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이 일어난다.
만일 진여자성이 없다면 눈이나 귀나 빛깔이나 소리가 곧 없어지리라.
선지식아!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므로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 하더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고 참된 성품이 항상 스스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능히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되 가장 으뜸가는 뜻은 움직임이 없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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