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 祖 法 寶 壇 經
門人 法海 集
後學 宅成 譯
同學 智首 校
第七 機緣品(제칠 기연품)
師者黃梅得法하사 回至韶州曹候村하시니 人無知者요 有儒士劉志略이 禮遇甚厚러라
志略이 有故爲尼하니 名이 無盡藏이라 常誦大涅槃經이러니 師가 暫聽하시고 卽知妙義하사 遂爲解說하신대
대사가 황매로부터 법을 얻으시고 소주의 조후촌으로 돌아오시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선비인 유지락이 매우 두터운 예로 대접하였다.
지략의 고모가 비구니였는데 이름은 무진장이었다.
항상 대열반경을 외웠는데 대사께서 잠깐 들으시고는 곧 그 심오한 뜻을 아시고 해설하여 주시니
尼乃執卷問字어늘 師가 曰字卽不識이나 義卽請問하라 尼가 曰字尙不識이어니 曷能會義리잇고 師가 曰諸佛妙理는 非關文字니라
尼가 驚異之하야 遍告里中耆德云호대 此是有道之士니 宜請供養하라한대 有晋武候玄孫曺叔良과 及居民이 競來瞻禮러라
그 비구니가 책을 잡고 글자를 묻기에 대사가 말씀하시길 “글자는 알지 못하니 뜻을 물어라.”하시니,
비구니가 말하기를 “글자도 알지 못하는데 뜻을 어떻게 압니까?” 하므로
대사가 말씀하시길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는 문자와 관계가 없느니라.” 하셨다.
비구니가 놀라고 이상히 여겨서 마을을 두루 다니며 덕이 높은 노인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도가 있는 선비이니 마땅히 청하여 공양하십시오.」 하였기에 전무후의 현손인 조숙량과 주민들이 다투어 와서 뵈었다.
時에 寶林古寺는 自隋末로 兵火已廢러니 遂於故基에 重建梵宇하고 延師居之하니 俄成寶坊이라
師住가 九月餘日에 又爲惡黨의 尋逐하야 師乃遁于前山이라가 被其縱火焚草木하야 師가 隱身挨入石中하야 得免이러시니 石이 於是에 有師趺坐膝痕과 及衣布之紋이라 因名避難石하다
그때 보림사라는 옛 절이 수나라 말기의 병화로 폐허가 되어 있었는데 이 빈터에 다시 법당을 세우고 대사를 맞이하여 지내시게 하니 얼마 안 되어 사찰이 이룩되었다.
대사가 머무신지 9개월쯤 또 나쁜 무리에게 쫓기게 되어 대사가 앞산으로 피하시자 그들이 불을 질러 초목을 다 태웠다.
대사는 돌 틈에 몸을 숨겨 화를 면하셨는데 그때 대사께서 가부좌하셨던 돌에 무릎 흔적과 옷자락 무늬가 남아 있어 피난석이라고 이름 하였다.
師憶五祖의 懷會止藏之囑하시고 遂行하야 隱于二邑焉하시니라
一僧法海는 韶州曲江人也라 初參祖師하고 問曰卽心卽佛을 願垂指諭하소서 師가 曰前念不生이 卽心이오 後念不滅이 卽佛이며 成一切相이 卽心이오 離一切相이 卽佛이니 吾若具說인댄 窮劫不盡이니라
대사는 오조께서 회(懷)를 만나면 머물고 회(會)를 만나면 숨으라고 당부하시던 것을 기억하시고 이 두 고을에 몸을 숨기셨다. 법해라는 스님은 소주의 곡강 사람이다. 처음 조사를 참례하고 묻기를
“마음이 곧 부처다 하는 것을 원하옵건대 가르쳐 주십시오,”하니
대사가 말씀하셨다.
“앞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곧 마음이요, 뒷생각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곧 부처이며 일체의 상을 이루는 것이 곧 마음이요 일체의 상(相)을 여의는 것이 곧 부처인데 내가 만일 이를 다 말하려면 겁이 다 하여도 다 하지 못하느니라.”
聽吾偈하라 曰
卽心名慧요 定慧等持하면 悟此法門은 用本無生이라 | 卽佛乃定이니 意中淸淨하리라 由汝習性이니 雙修是定이니라 |
法海가 言下에 大悟하야 以偈讚曰호대
卽心이 元是佛이어늘 我知定慧因하야 | 不悟而自屈하나니 雙修離諸物이로다 |
나의 게송을 들어 보라.
마음이 곧 혜요
부처가 곧 정(定)이니
정과 혜가 서로 같으면
그 뜻이 청정하리라.
나의 이 법문을 깨달음은
너의 습성을 말미암음이니
용(用)은 본래 나는 것이 아니므로
쌍으로 닦음이 옳으리라.
법해가 말씀 아래 크게 깨달아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마음이 원래 부처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바르지 못하였는데
나는 이제 정과 혜의 원인을 알았으니
쌍으로 닦아 모든 물건을 여의겠습니다.
僧法達은 洪州人이라 七歲에 出嫁하야 常誦法華經이러니 來禮祖師에 頭不至地어늘 師가 詞曰禮不投地하니 何如不禮리오 汝心中에 必有一物이니 蘊習何事耶아 曰念法華經을 已及三千部호이다
祖가 曰汝若念至萬部하야 得其經意라도 不以爲勝則與吾偕行이어니와 汝今負此事業하야 都不知過하니 聽吾偈하라 曰
禮本折慢幢이어늘 有我면 罪卽生이오 | 頭奚不至地오 亡功하면 福無比니라 |
법달 스님은 홍주 사람이다. 7세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외웠는데 조사에게 예배드릴 때에 머리가 땅에 닿지 않으므로 조사가 꾸짖으며
“절을 할 때 머리가 땅에 닿지 않으니 절을 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느냐. 네 마음속에 반드시 한 물건이 있기 때문인데 무슨 일을 쌓아 익혔느냐.” 하시니 “법화경을 이미 삼천 번이나 외웠습니다.” 하기에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만 번을 외워 그 경의 뜻을 얻었더라도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으면 나와 더불어 함께 행할 것인데 네가 지금 그 일을 자부하며 도무지 허물을 알지 못하니 나의 게송을 들어 보아라.”
예배(禮拜)는 본래 아만의 깃발을 꺾자는 것인데
어찌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를 않는가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죄가 생겨나고
공(功)을 잊으면 복이 한량없으리라.
師가 又曰汝名이 什麽오 曰法達이니이다 師가 曰汝名法達이나 何曾達法이오 復說偈曰
汝今名法達이나 空誦하면 但循聲이오 汝今有緣故로 但信佛無言하면 | 勤誦未休歇하니 明心하면 號普薩이니다 吾今爲汝說하노니 蓮華가 從口發하리라 |
達이 聞偈悔謝曰 而今而後에 當謙恭一切호리이다 弟子가 誦法華經호대 未解經義하야 心常有疑로소니 和尙은 智慧廣大하시니 願略說經中義理하소서
師가 曰法達은 法卽甚達이니 汝心不達이니 經本無疑어늘 汝心自疑로다 汝念此經에 以何爲宗고 達이 曰學人은 根性이 暗鈍하야 從來로 但依文誦念이어니 豈知宗趣리잇고
대사가 다시 “너의 이름이 무엇인가.”하시니 “법달입니다.”하므로 “너의 이름이 법달이라 하지만 어찌 법을 통달했겠느냐.”하시며 다시 게송을 하셨다.
네가 방금 법달이라 하였는데
부지런히 외울 뿐 쉬지 못하니
공연히 외우면 소리만 쫓고
마음을 밝히면 보살이라 이름하리
네가 이제 인연이 있으므로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다만 부처님은 말이 없음을 믿으면
연꽃이 입에서 피어나리라.
법달이 게송을 듣고 깊이 뉘우치며 말씀드렸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일체에 대하여 겸손하겠으며, 공경하겠습니다. 제자가 법화경을 외웠으나 경의 뜻을 알지 못해서 마음에 항상 의심이 있었는데 화상께서는 지혜가 넓고 크시니 원컨대 간략하게 경의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대사가 말씀하셨다.
“법달이 법에는 통달했으나 네 마음에는 통달하지 못했구나, 경은 본래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인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구나. 네가 이 경을 외울 때 무엇으로써 근본을 삼느냐?”
법달이 말하기를
“저는 근성이 어둡고 둔하여 이제까지 문자에만 의지하여 외웠을 뿐이니 어찌 근본취지를 알겠습니까?” 하므로
師가 曰吾不識文字하니 汝試取經하야 誦之一徧하라 吾當爲汝解說호리라
法達이 卽高聲念經하야 至譬喩品이어늘 師가 曰 止하라 此經은 元來以因緣出世로 爲宗이니 縱說多種譬喩라도 亦無越於此니라 何者因緣고 經에 云諸佛世尊이 唯以一大事因緣故고 出現於世라하시니 一大事者는 佛之知見也라 世人이 外迷著相하고 內迷著空이어니와 若能於相에 離相하고 於空 離空하면 卽是內外不迷니 若悟此法하야 一念心開하면 是爲開佛知見이니라
조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문자를 모르니 네가 경을 가지고 한번 외워 보아라.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해 해설해 주리라.”
법달이 곧 고성으로 경을 외워 <서품, 방편품, 비유품,>에 이르렀을 때 조사가 이르시기를
“그쳐라 이 경은 원래 <인연 출세>로써 근본을 삼았으니 비록 여러 가지의 비유를 설하지만 이를 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인연이라 하는가 하면 경에 이르시기를 「모든 부처님 세존은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이 세상에 출연하신다.」하셨는데 일대사(한 가지 큰일)란 곧 부처님의 지견이다. 세상 사람들은 밖으로 미혹하여 상(相)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여 공(空)에 집착하는데, 만일 상에 대하여 상을 여의고 공에 대하여 공을 여의면 곧 안과 밖이 미혹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법을 깨달아서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이것을 부처님의 지견이 열린 것이다
佛은 猶覺也라 分爲四門하니 開覺知見하며 示覺知見하며 悟覺知見하며 入覺知見이라 若聞開示하고 便能悟入하면 卽覺知見本來眞性이 而得出現이니 汝愼勿錯解經意하야 見他道開示悟入하고 自是佛之知見이라 我輩는 無分이니 若作此解하면 乃是謗經毁佛也니라
부처란 깨달음이라는 뜻인데 나누면 네 가지가 되느니라. 깨달음의 지견을 열고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며 깨달음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 깨달음의 지견에 들게 하는 것이다. 만일 열어 보이심을 듣고 문득 깨달아 들어가면 곧 깨달음의 지견인 본래의 참 성품이 나타날 것이다.
내가 경의 뜻을 잘못 알아서 「열어 보이어 깨달아 들어가게 한다.」고 하신 것에 대하여 이것은 부처님의 지견이지 우리들에게는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라.
만일 이렇게 이해하면 이것은 경을 비방하는 것이며 부처님을 헐뜯는 것이다.
彼旣是佛이라 已具知見이어니 何用更開리오 汝今當信 佛知見者인댄 只汝自心이오
更無別佛이어늘 蓋爲一切衆生이 自蔽光明하고 貪愛塵境하야 外緣內擾하야 甘受驅馳일새 便勞他世尊의 從三昧起하사 種種苦口로 勸令寢息이니 莫向外求하면 與佛無二라 故로 云開佛知見이라하시니 吾亦勸一切人하노니 於自心中에 常開佛之知見이어다
자기가 이미 부처님이고 이미 지견을 갖추었는데 어찌 다시 열 것이 있겠는가. 너는 이제 마땅히 믿어라.
부처님의 지견이라는 것은 다만 너 자신의 마음이지 다시 다른 부처님이 없느니라. 대체로 모든 중생이 스스로 광명을 가리고 육진 경계를 탐내고 사랑하여서 밖으로 인연을 일으키고 안으로 흔들려서 쫓고 쫓기는 시달림을 달게 받으므로 부처님께서 수고스럽게도 삼매에서 일어나셔서 갖가지 간곡한 말씀으로 권하여 편안히 쉬게 하셨느니라. 밖을 향하여 구하지 않으면 부처님과 더불어 둘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견을 연다 하셨느니라. 나도 사람들에게 권하는데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님의 지견을 항상 열어라.
世人이 心邪하야 遇迷造罪하야 口善心惡하야 貪瞋嫉妬와 諂佞我慢으로 侵人害物하야 自開衆生知見이어니와 若能正心으로 常生智慧하야 觀照自心하야 止惡行善하면 是自開佛之知見이니 汝須念念에 開佛知見하고 勿開衆生知見이어다 開佛知見하면 卽是出世요 開衆生知見하면 卽是世間이니 汝若但勞勞執念하여 以爲功課者인댄 何異犛牛愛尾리요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삿되고 어리석고 미혹하여 죄를 짓게 되며 입으로는 착하지만 마음으로는 악해서 탐내고 성내며 질투하는 마음과 아첨하고 교만하며 〈나〉라는 생각으로 남을 해치고 사물을 해롭게 하여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여느니라. 만일 바른 마음으로 항상 지혜를 내어서 자기의 마음을 비추어 보아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이것이 스스로 부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생각 생각에 부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마라라. 부처의 지견을 열면 이것이 곧 세간을 떠난 것이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곧 세간이니 네가 만일 힘들여 경이나 외우고 생각을 집착하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이우(길고 칼 같은 꼬리를 스스로 핥다가 죽는다는 소)가 제 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達이 曰 若然者인댄 但得解義요 不勞誦經耶잇가
師가 曰 經有何過완대 豈障汝念이리오
只爲迷悟가 在人하고 損益이 由己니 口誦心行하면 卽是轉經이요 口誦心不行하면 卽是被經轉이니라 聽吾偈하라 曰
心迷에 法華가 轉이오 心悟에 轉法華니
誦經久不明하면 與義作讐家하리라
無念에 念卽正이오 有念에 念成邪니
有無俱不計하면 長御白牛車하리라
達이 聞偈하고 不覺悲泣하야 言下大悟하야 而告師曰 法達이 從昔已來로 實未曾轉法華하고 乃被法華轉이로소이다
법달이 말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뜻만 이해하고 경은 수고스럽게 외울 필요가 없습니까?” 하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경에 무슨 허물이 있어서 너보고 못 외우게 하겠느냐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이 사람에게 있고 손해와 이익이 자기에게 달렸으니 입으로 외우며 마음으로 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이고 입으로 외우지만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경에게 굴림을 받는 것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라.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경이 너를 굴리고
마음이 깨달으면 네가 법화경을 굴리느니라.
경을 아무리 외워도 그 뜻을 밝히지 못하면
뜻과는 오히려 원수가 되리라.
생각이 없으면 생각이 곧 바르고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삿되니
유와 무를 다 따지지 않으면
오래토록 흰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놀 수 있으리라.
법달이 게송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울다가 말 아래에 크게 깨달아서 조사께 말씀드리기를
“법달은 이제까지 한 번도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고 법화경의 굴림을 받았습니다.”하며
再啓曰 經에 云諸大聲聞과 乃至菩薩이 皆盡思共度量하야도 不能測佛智라하야시늘 今令凡夫로 但悟自心하면 便名佛之知見이라하시니 自非上根이면 未免疑謗이로소이다
又經에 說三車하시니 羊鹿之車가 與白牛之車로 如何區別이니잇고 願和尙은 再垂開示하소서
師가 曰 經意分明이어늘 汝自迷背로다
諸三乘人이 不能測佛智者는 患在度量也니 饒伊盡思共推라도 轉可懸遠이니라
佛이 本爲凡夫說이오 不爲佛說이니 此理를 若不肯信者가 從他退席이니 殊不知坐却白牛車하고 更於門外에 覓三車로다
다시 말씀드리기를
“경에서는 대 성문들과 보살들이 모두 다 같이 생각을 다 하여 함께 헤아리더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다 하였는데 지금 범부로 하여금 다만 자기의 마음을 깨달으면 곧 부처님의 지견이라 한다 하시니 스스로 상근기가 아니면 의심이나 비방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경에 세 가지 수레를 설하였는데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가 흰 소가 끄는 수레와 어떻게 다른지 원하옵건대 화상께서 한 번 더 가르침을 열어 주십시오.” 하니
조사가 말씀하시길
“경의 뜻이 분명한데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등진 것이로다. 성문 연각 보살들이 능히 부처님의 지혜를 측량하지 못하는 것도 그 병이 헤아리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생각을 다하고 이치를 따져 보아도 점점 더 먼 곳으로 떨어지는 것이니라.
부처님을 본래 범부를 위하여 설하신 것이지 부처님을 위하여 설하신 것이 아니다. 이 이치를 만약 믿지 못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물러가도 좋은데 흰 소가 끄는 수레에 앉아 있으면서 다시 문밖에 있는 세 수레를 찾는 것은 전혀 알 수가 없구나.
況經文에 明向汝道하사대 唯一佛乘이오 無有餘乘의 若二若三이며 乃至無數方便과 種種因緣 譬喩言詞가 是法이 皆爲一佛乘故라하시니 汝何不省고 三車는 是假라 爲昔時故요 一乘은 是實이라
爲今時故나 只敎汝로 去假歸實이언정 歸實之後엔 實亦無名이라 應知所有珍財가 盡屬於汝하야 由汝受用이니 更不作父想하며 亦不作子想하며 亦無用想이 是名持法華經이라 從劫至劫토록 手不釋卷하며 從晝至夜토록 無不念時也니라
하물며 경문에 너희에게 분명히 이르기를 ‘오직 일불수이요 다른 이승과 삼승은 없다.’하였고 ‘수 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이야기가 곧 법이며 모두 다 일불승을 위한 것이다.’하셨는데 너는 어찌 살피지 못하는가.
세 가지 수레는 거짓이고 옛날을 위한 것이며 일승은 진실하고 지금을 위한 것이다.
다만 너희로 하여금 거짓을 버리고 참다운 것에 돌아가게 함인데 참다움에 돌아가면 참다움이란 이름도 없느니라.
마땅히 알아라. 온갖 보배와 재물이 다 너에게 속해있고 네가 쓰기에 달려 있으니 다시는 아버지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아들이라는 생각도 하니 말며 또 쓴다는 생각도 없어야 하느니라. 이것이 법화경을 지닌다고 이름하느니라.
아득한 과거에서 먼 미래에 이르도록 손에 책을 놓지 않고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생각지 않는 때가 없음이 되느니라.”
達이 蒙啓發하고 踊躍歡喜하야 以偈讚曰
經誦三千部가 曹溪一句亡이로다
未明出世旨하면 寧歇累生狂이리요
羊鹿牛는 權設이오 初中後善揚이라
誰知火宅內가 元是法中王이리오
師가 曰汝今後에 方可名念經僧也로다
達이 從此領玄旨하고 亦不輟誦經하러라 僧智通은 壽州安豊人이라
初看楞伽經을 約千餘遍호대 而不會三身四智하야 禮師코 求解其義한대 師가 曰三身者는 淸淨法身은 汝之性也요 圓滿報身은 汝之智也요
千百億化身은 汝之行也니 若離本性하고 別說三身하면 卽名有身無智어니와 若悟三身이 無有自性하면 卽名四智菩提니라
법달이 가르침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며 게송으로 찬탄하기를
경을 삼천 번 외운 것이
조계의 한마디에 없어졌다.
출세의 뜻 밝히지 못하면
어찌 여러 생의 미친 짓을 쉴 것인가.
양과 사슴과 소를 방편으로 삼아
처음과 중간과 나중에도 잘 설하셨네
누가 불난 집의 속이
원래 이 법왕의 처소인 줄 알았으랴.
조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야 비로소 경을 외우는 스님이라 이름할 수 있겠구나.”
법달이 이때부터 깊은 뜻을 알았으며 경 외우기를 쉬지 않았다. 지통이라는 스님은 수주의 안풍 사람이다.
처음에 능가경 보기를 약 천 번을 하였지만 세 가지의 몸과 네 가지의 지혜를 알지 못해서 조사께 예배하고 그 뜻의 해석을 구하였다.
조사가 이르시길
“세 가지 몸이라는 것에서 청정법신은 너의 버릇이고 원만보신은 너의 지혜며 천 백억화신은 너의 행이다. 만일 본성을 여의고 따로 세 가지 몸을 말한다면 곧 몸만 있고 지혜가 없는 것이며, 만일 세 가지 몸에 자성이 없음을 깨달으면 곧 네 가지 지혜의 보리라 한다.”
聽吾偈하라 曰
自性이 具三身하야 發明成四智하나니
不離見聞緣하고 初然登佛地로다
吾今爲汝說하노니 諦信永無迷하야
莫學馳求者의 終日說菩提어다
通이 再啓曰四智之義도 可得聞乎잇가
師가 曰旣會三身인댄 便明四智니 何更問耶아 若離三身하고 別談四智하면 此名有智無身也니 卽此有智가 還成無智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자성이 삼신(三身)을 갖추었으니
이를 밝히면 사지(四智)를 이루나니
보고 듣고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히 불지(佛地)에 오르도다.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설하노니
자세히 믿고 영원히 미혹하지 말아서
허겁지겁 달리며 구하는 자가
종일토록 떠드는 보리는 배우지 말라.
지통이 다시 여쭙기를 “네 가지 지혜의 뜻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사가 말씀하셨다.
“이미 세 가지 몸을 알았다면 네 가지 지혜를 밝힌 것인데 어찌하여 다시 묻느냐? 만일 삼신을 떠나서 별도로 사지를 말한다면 이것은 지혜만 있고 몸이 없는 것이니 지혜가 도리어 무지(無智)를 이룬 것이니라.”
復偈曰
大圓鏡智는 性淸淨하고 平等性智는 心無病하며
妙觀察智는 見非功이오 成所作智는 同圓鏡이로다
五八六七은 果因轉이라 但用名言無實性이니
若於轉處에 不留情하면 繁興永處那伽正하리라
通이 頓悟性智하야 遂呈偈曰
三身이 元我體요 四智가 本心明이라
身智가 融無碍하야 應物任隨形이로다
起修가 皆妄動이오 守住匪眞精이라
妙旨를 因師曉하니 終亡染汚名이로다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대원경지는 성품이 청정한 것이고(너, 나가 없고, 팔식)
평등성지는 마음에 병이 없는 것이며(혼자, 칠식)
묘관찰지는 견(見)이 공(功)이 아니요(상대, 육식)
성소작지는 둥근 거울과 같은 것이니라.(오식)
오식과 팔식은 과(果)이고 육식과 칠식은 인(因)을 굴린 것이다.
이름과 말만 있을 뿐 참 성품은 없네.
구르는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번잡히 일어나더라도 영원히 나가정(부처님의 삼매)에 있으리라.
지통이 성품의 지혜를 대번에 깨달아서 게송을 바쳤다.
세 가지 몸이 원래 나의 몸이고
네 가지 지혜는 본래 마음의 밝음이라.
몸과 지혜가 원융하여 걸림이 없으니
객관에 응하여 형상을 임의로 하네
수행을 일으킴이 모두 망령된 움직임이요.
머무름을 지키는 것도 참다움이 아니네.
묘한 뜻을 스승으로 인하여 깨달으니
마침내 물들었다는 이름도 없어지네.
僧智常은 信州貴谿人이라 髫年에 出家하야 志求見性이러니 一日에 參禮한대 師가 問曰汝從何來며 欲求何事오 曰學人은 近往洪州白峯山하야 禮大通和尙하고 蒙示見性成佛之義나 未決狐疑일새 遠來投禮로소니 伏望和尙은 慈悲指示하소서
師가 曰彼가 有何言句오 汝試擧看하라 曰智常이 到彼하야 凡經三月호대 未蒙示誨라 爲法切故로 一夕에 獨入丈室하야 淸問如何是某甲의 本心本性이러니 大通이 乃曰汝見虛空否아 對曰見이니다
彼가 曰汝見虛空이 有相貌否아 對曰虛空은 無刑이어니 有何相貌이잇고 彼가 曰汝之本性이 猶如虛空하야 了無一物可見이 是名正見이오
了無一物可知가 是名眞知며 無有靑黃長短하고 但見本源淸淨한 覺體圓明이 卽名見性成佛이오 亦名如來知見이니라하야시늘 學人이 雖聞此說이나 猶未決了하소니 乞和尙은 開示하소서
지상스님은 신주 귀계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견성하기를 바라다가 어느 날 찾아뵙고 예를 드리니 조사가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일을 구하고자 하는가?”
“제가 근래에 홍주 백봉산에 가서 대통화상을 뵈었더니 견성성불의 뜻을 보뎌 부시던데 의심을 풀지 못하여 멀리서 와 예배드리니 엎드려 바라건대 화상께서 자비로 가르쳐 주십시오.”
“그곳에서 어떤 말을 하더냐? 네가 한번 보여 보아라.”
“지상이 그곳에 이르러서 석 달이나 지났는데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법을 위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므로 어느 날 저녁에 홀로 방장실에 들어가
「어떤 것이 이 지상의 본마음이고 본 성품입니까?」라고 여쭈었더니,
대통화상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허공을 보았느냐?」하시기에
「보았습니다.」하니
「네가 본 허공이 모양이 있더냐?」하시기에
「허공은 형체가 없는데 무슨 모양이 있겠습니까?」하였더니,
말씀하시길
「너의 본래 성품도 허공과 같아서 마침내 한 물건도 볼 것이 없는데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 마침내 한 물건도 알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 이것이 참되게 아는 것이며 푸른 것, 노란 것, 짧은 것이 없고 다만 근본바탕이 청정하고 깨달음의 본체가 뚜렷이 밝음을 보는 것이 곧 견성성불이며 여래의 지견이라 하셨습니다.」 제가 비록 이 말씀을 들었으나 확실히 알지 못했사오니 빌건대 화상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師가 曰彼師所說이 猶存見知일새 故로 令汝未了니 吾今示汝一偈호리라
不見一法存無見이여 大似浮雲遮日面이오
不知一法守空知여 還如太虛에 生閃電이로다
此之知見이 瞥然興하면 錯認이라 何曾解方便이리요
汝當一念自知非하면 自己靈光이 常顯現하리라.
常이 聞偈已하고 心意豁然하야 乃述偈曰
無端起知見하야 著相求菩提하나니
情存一念悟하면 寧越昔時迷리오
自性覺源體가 隨照枉遷流하나니
不入祖師室하면 茫然趣兩頭로다
조사가 말씀하셨다.
“그 스님의 말씀에는 아직도 보는 것과 아는 것이 남아 있으므로 너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내가 이제 너에게 한 게송을 보이리라.”
한 법도 보지 않고 없다는 생각을 두는가.
크게 뜬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과 같구나.
한 법도 알지 못해서 공한 지(知)를 지킴이여
도리어 허공에 번개가 번쩍 일어남과 같도다.
이런 지견이 잠시라도 일어나면 잘못 안 것이니
어찌 방편인 줄 알리요.
네가 마땅히 한 생각에 그릇된 줄만 알면
자기의 신령스런 광명이 항상 드러나리라.
지상이 게송을 듣고 마음이 활짝 열려 게송을 지어 올렸다.
무단히 지견을 일으켜서
상에 빠져 보리를 구하나니
마음에 한 생각 깨달음을 두면
어찌 옛날의 미혹함을 넘으리오.
자성의 각원체(覺源體)가 비침을 따라
잘못 흐르니 조사의 방에 들지 못하면
막연하게 두 가지만 키우리라.
智常이 一日에 問師曰佛說三乘法하고 又言最上乘하시니 弟子未解로소니 願爲敎授하소서
師가 曰汝觀自本心하고 莫著外法相하라 法無四乘이언마는 人心이 自有等差니 見聞轉誦은 是小乘이오 悟法解義는 是中乘이오 依法修行은 是大乘이오 萬法盡通하며 萬法俱備호대 一切不染하고 離諸法相하야 一無所得이 名最上乘이니라
乘是行義라 不在口爭이니 汝須自修하고 莫問吾也하라 一切時中에 自性自如니라
常이 禮謝執侍하야 終師之世하니라
지상이 어느 날 조사에게 여쭙기를 “부처님이 삼승법을 설하시고 또 최상승을 말씀하시니 제자가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가르쳐 주십시오.”
조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자기의 본심만 보고 밖의 법상에 집착하지 마라라. 법에는 네 가지 승이 없는데 사람들의 마름에 차별이 있어서 듣고 외우기만 하는 것은 소승이고 법을 깨달아 뜻을 알면 중승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대승이고 만법을 다 통하며 만법을 다 갖추되 일체에 물들지 않고 모든 법상을 여의어서 하나도 얻는 것이 없는 것을 최상승이라 이름 하느니라. 승이라는 것은 곧 행한다는 뜻이며 입으로 다투는데 있지 않으니 네가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마라라. 언제 어느 때나 자성은 스스로 여여 하니라.” 지상이 예배드리고 조사가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항상 모셨다.
一僧志道는 廣州南海人也라 請益曰學人이 自出家로 覽涅槃經이 十載有餘로대 未明大意로소니 願和尙은 垂誨하소서 師가 曰汝何處에 未明고 曰諸行이 無常이라 是生滅法이니 生滅이 滅已하면 寂滅이 爲樂이라하시니 於此에 疑惑하노이다
師가 曰汝作麽生疑오 曰一切衆生이 皆有二身하니 謂色身法身也라 色身은 無常하야 有生有滅이어니와 法身은 有常하야 無知無覺이어늘 經에 云生滅이 滅已하면 寂滅이 爲樂者는 不審케라 何身이 寂滅이며 何身이 受樂이니잇고 若色身者인댄 色身이 滅時에 四大分散하야 全然是苦니 若不可言樂이오
若法身인댄 寂滅하야 卽同草木瓦石이어니 誰當受樂이리잇고 又法性은 是生滅之體요 五蘊은 是生滅之用이니 一體五用이 生滅이 是常이라 生則從體起用하고 滅則攝用歸體하나니 若聽更生인댄 卽有情之類가 不斷不滅이오
若不聽更生인댄 則永歸寂滅하야 同於無情之物이니 是卽一切諸法이 被涅槃之所禁伏하야 尙不得生이어니 何樂之有리잇고
지도라는 스님은 광주의 남해 사람이다. 법문을 청하며 말씀드리길 “제가 출가해서 열반경을 두루 본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대의를 밝히지 못했사오니 원컨대 화상께서 가르침을 주옵소서.”
조사가 “네가 어느 곳을 밝히지 못했는고?” 하시자
“「모든 현상이 무사하여 나고 죽는 법이니 나고 죽음이 없어지면 적멸이 낙이 된다.」하는 것에 의심이 있습니다.”하므로
“네가 어떻게 의심하는가.” 하시니 말하기를
“일체 중생이 모두 두 가지 몸이 있으니 이른바 색신(육신)과 법신입니다. 색신은 무상하여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은 법신은 항상하여 앎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데 열반경에 이르기를 「나고 죽음이 멸하여 마치면 적멸이 낙이 된다.」하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몸이 적멸이며, 어떤 몸이 낙을 받는다는 말씀입니까? 만일 육신이라면 육신이 없어질 때에 사대가 흩어져서 아주 괴로울 뿐인데 괴로움을 낙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법신이라면 적멸하여 곧 초목이나 흙이나 돌과 같은 것인데 누가 마땅히 낙을 받습니까? 또 법의 성품은 나고 죽는 것의 체(體)이고 오온은 생멸의 용(用)이니 한 체에 다섯 작용(색 · 수 · 상 · 행 · 식)으로 나고 죽는 것은 떳떳한(常)것으로써 나는 것은 본체에서 일으킨 작용이고 죽는 것은 작용을 거두어서 본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다시 난다고 하면 곧 유정의 종류(중생살이)에서 끊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다시 나지 않는다고 하면 영원히 적멸한 곳으로 돌아가서 무정의 물질과 같을 텐데 이와 같다면 모든 법이 열반에 묶이어 오히려 나지도 못할 것이니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師가 曰汝是釋子어늘 何習外道의 斷常邪見하야 而議最上乘法고 據汝所說컨댄 卽色身外에 別有法身이며 離生滅코 求於寂滅이로다 又推涅槃常樂하야 言有身受用이라하니 斯乃執悋生死하야 耽著世樂이로다
汝今當知하라 佛이 爲一切迷人이 認五蘊和合하야 爲自體相하고 分別一切法하야 爲外塵相하야 好生惡死하야 念念遷流하야 不知夢幻虛假하고 枉受輪廻하야 以常樂涅槃으로 飜爲苦相하야 終日馳求할새 佛이 愍此故로 乃示涅槃眞樂은 刹那에도 無有生相하며 刹那에도 無有滅相하야 更無生滅可滅이 是卽寂滅現前이니 當現前時하야 亦無現前之量일새 乃謂常樂이라하시니 此樂은 無有受者하여 亦無不受者어니 豈有一體五用之名이며 何況更言涅槃이 禁伏諸法하야 令永不生가 斯乃謗佛毁法이로다
조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부처님의 제자인데 어찌 외도의 극단적인 견해와 삿된 견해를 익혀 최상승법을 의논하려 하느냐? 네가 말한 대로 한다면 곧 육신 외에 별도로 법신이 있으며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는 것이다. 또 열반의 항상 즐거움도 몸이 있어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는 생사를 집착하고 아껴서 세간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이다.
너는 이제 마땅히 알아라.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미혹한 사람들이 오온이 화합된 것을 자기의 근본 모습으로 삼고 일체법을 분별하여 바깥 모습으로 삼아서 나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며 생각 생각에 바뀌며 흘러가서 꿈이고 허깨비이며 거짓인줄 모르고 잘못 윤회를 받아서 항상 즐거운 열반을 도리어 괴로운 것으로 잘못 알고 종일토록 찾아 헤매므로 부처님이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열반의 참다운 즐거움은 찰나에도 나는 상이 없으며 찰나에도 없어지는 상이 없어서 다시 생과 멸을 멸할 것도 없는 것으로 즉 적멸이 앞에 드러나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니라. 앞에 드러났을 때에 앞에 드러났다는 생각도 없어야 상락(常樂)이라 하느니라.
이 낙을 받는 자도 없고 또한 받지 않는 자도 없는 것이니 어찌 하나의 체에 다섯 가지 용이라는 이름이 있겠으며 어찌 하물며 다시 열반이 모든 법을 묶어서 영원히 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겠느냐. 이런 말은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헐뜯는 것이로다.”
聽吾偈하라 曰
無上大涅槃이여 凡愚는 謂之死하고 諸求二乘人은 盡屬情所計라 妄立虛假名이어니 惟有過量人은 以知五蘊法과 外現衆色像과 平等如夢幻하야 不作涅槃解하야 常應諸根用호대 分別一切法호대 劫火燒海底하고 眞常寂滅樂은 吾今强言說하야 汝勿隨言解하면 | 圓明常寂照어늘 外道는 執爲斷하며 目以爲無作하나니 六十二見本이로다 何爲眞實義리오 通達無取捨하야 及以蘊中我와 一一音聲相이 不起凡聖見하고 二邊三際斷하야 而不起用想하며 不起分別想하나니 豊鼓山相擊이라도 涅槃相이 如是나니라 令汝捨邪見하노니 許汝知少分호리라 |
志道가 聞偈大悟하야 踊躍하고 作禮而退하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위가 없는 대 열반이여 뚜렷이 밝아 항상 비치거늘 어리석은 범부는 죽는다 말하고 외도는 집착하여 단멸(斷滅)을 삼으며 이승(二乘)을 구하는 모든 사람은 하는 것 없음을 내세우네 모두 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 육십이견의 근본이로다. 망령되이 세운 헛된 이름이리니 어찌 진실한 뜻이 도리요. 오직 헤아림을 초월한 사람이라야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음을 통달하여서 오온법과 오온 가운데의 나와 밖으로 나타나는 온갖 색상과 낱낱 음성의 상이 평등하여 꿈이고 환상인 줄 알아서 범부, 성인 하는 소견이 나지 않고 열반의 알음알이도 짓지 않으며 이변(二邊)과 삼제(三際)가 끊어져서 항상 모든 근기를 맞추어 쓰지만 쓴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일체 법을 분별하지만 분별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안하며 겁화가 일어나 바다 밑을 태우고 산과 산이 부딪치는 바람에 불어도 참되고 떳떳한 적멸의 즐거움은 열반의 모습 이와 같으니라. 내가 이제 굳이 말하여 너로 하여금 사견을 버리게 하리니 네가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면 네가 조금 알았다고 허락하리라. |
지도가 게송을 듣고 크게 깨달아서 뛸 듯이 기뻐하며 절을 하고 물러갔다.
行思禪師의 姓은 劉氏니 吉州安城人也라 聞曹溪法席이 盛化하고 徑來參禮하야 遂問曰當何所務로사 卽不落階級니잇고 師가 曰汝가 曾作甚麽來오 曰聖諦도 亦不爲호이다 師가 曰落何階級고 曰聖諦도 尙不爲어니 何階級之有이잇고 師가 深器之하사 令思로 首衆하시니라 一曰에 師가 謂曰汝當分化一方하야 無令斷節하라 思旣得法에 遂回吉州靑原山하야 弘法紹化하니라
행사선사의 성은 유씨이고 길주 안성 사람이다. 조계의 법석이 성황을 이룬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와서 예를 드리고 물었다.
“마땅히 어떻게 힘써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조사가 말씀하시길
“네가 일찍이 무엇을 어떻게 해 왔느냐?” 하시니
“성인의 진리도 또한 하니 않습니다.” 하므로
“어떠한 계급에 떨어졌느냐?” 하시니
“성인의 진리도 오히려 하니 않았는데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 하므로 조사가 깊이 법기로 여기시고 행사를 대중의 우두머리로 삼으셨다.
어느 날 조사가 말씀하시기를
“너는 마땅히 한 지방을 맡아 교화하여 법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하셨다. 행사가 이미 법을 얻었으므로 길주의 청원산으로 돌아가 법을 크게 펴고 교화하였다.
懷讓禪師는 金州杜氏의 子也라 初謁嵩山安國師에 安이 發之曹溪參扣어늘 讓이 至禮拜한대 師가 曰甚處來오 曰嵩山이니이다 師가 曰什麽物이 恁麽來오 曰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이다 師가 曰還可修證否아 曰修證은 卽不無어니와 汚染은 卽不得이니다 師가 曰只此不汚染이 諸佛之所護念이라 汝旣如是하니 吾亦如是하니라 西天般若多羅가 讖하사대 汝足下에 出一馬駒하야 踏殺天下人이라하시니 應在汝心라고 不須速說이어다 讓이 豁然契會하야 遂執侍左右를 一十五載에 日臻玄奧러니 後往南嶽하야 大闡禪宗이니라
회양선사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에 숭산의 안국사를 뵈었는데 안국사가 조계에 가서 뵈옵고 물어보라 하므로 찾아가서 예배하였다.
조사가 말씀하셨다.
“어느 곳에서 왔는고?”
“숭산에서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한 물건이라고 말하여도 맞지 않습니다.”(8년 뒤 대답)
“도리어 가히 닦아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냐?”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물들어 더럽혀 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때 묻지도 물들지도 않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호념하시는 바인데 네가 이미 이와 같으니 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 다라가 예언하시기를 너의 발아래에 망아지가 한 마리 나와서 천하의 사람을 밟아 죽이리라 하셨으니 마땅히 네 마음에만 두고 모름지기 속히 설하지 말지어다.”
회양이 활연히 깨닫는 바가 있어서 좌우에서 모시기를 15년이나 하였으며, 날로 더욱 깊고 오묘한 경지에 들어갔으며 뒤에 남악으로 가서 선종을 크게 드날렸다.
永嘉玄覺禪師는 溫州戴氏子이다 少習經論하야 精天台止觀法門이라가 因看維摩經하야 發明心地러니 偶師弟子玄策이 相訪하야 與其劇談에 出言이 暗合諸祖어늘 策이 云仁者의 得法師가 誰오 曰我聽方等經論은 各有師承이오 後於維摩經에 悟佛心宗이나 未有證明者로라
策이 云威音王已前엔 卽得이어니와 威音王已後에 無師自悟는 盡是天然外道니라 云호대 願仁者는 爲我證據하라 策이 云我言은 輕이라 曹溪에 有六祖大師하시니 四方이 雲集하야 幷是受法者니 若去인댄 則與偕行호리라 覺이 遂同策來參하야 繞師三匝하고 振錫而立한대 師가 曰夫沙門者는 具三千威儀아 八萬細行이어늘 大德은 自何方而來완대 生大我慢고 覺이 曰生死事大하고 無常이 迅速이니이다
師가 曰何不體取無生하며 了無速乎아 曰體卽無生이오 了本無速이니이다 師가 曰如是如是하다 玄覺이 方具威儀하야 禮拜하고 須臾에 告辭한대 師가 曰返太速乎인저 曰本自非動이어니 豈有速耶리잇고 師가 曰誰知非動고 曰仁者가 自生分別이니이다 師가 曰汝甚得無生之意로다
曰無生이 豈有意耶이닛가 師가 曰無意면 誰當分別고 曰分別은 亦非意니이다 師가 曰善哉라 少留一宿하라하시니 時에 謂一宿覺이라하다 候에 著證道歌와 盛行于世하니라
영가 현각선사는 온주대씨의 자손이다. 젊어서부터 경과 논을 익혀 천태의 지관 법문에 정통하였는데 유마경을 보다가 마음자리를 밝히게 되었다. 우연히 조사의 제자인 현책이 찾아와서 그와 더불어 법에 대하여 깊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하는 말이 은근히 조사들의 뜻에 맞으므로 현책이
“인자에게 법을 주신 스승은 누구십이까?”하니 현각이 말하기를
“내가 방등경론을 들을 적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뒤에 유마경레서 불심종(佛心宗)을 깨닫고는 아직 증명해 주실 분이 없습니다.”하였다.
현책이 “위음왕불 이전에는 그럴 수 있었지만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은 천연외도라 하였습니다.”하니 현각이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 주십시오.”하므로 현책이 말하기를
“나의 말은 가볍습이다. 조계에 육조대사가 계시는데 사방에서 모여들어 법을 받고 있으니 만일 가시겠다면 함께 가겠습니다.”하였다.
현각이 드디어 현책과 같이 와서 찾아뵈었는데 조사의 주위를 세 번 돌고는 지팡이로 짚고 서 있으므로 조사가
“무릇 사문은 3천의 위의와 8만의 세행을 갖추어야 하는데 대덕은 어느 곳에서 왔기에 큰 아만을 부리는가?”하시니 현각이 말하길
“생사의 일이 크고 무상이 신속하나이다.”하므로
“어찌 나는 것이 없음을 체달하지 못하여 빠르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느냐.”하시자
“체달함에는 곧 생겨남이 없고 요달함에는 본래 빠름이 없습니다”하기에 조사가 “옳다, 옳다.”하시니
현각이 바야흐로 위의를 갖추어 예배하고 곧 하직인사를 드렸다. 조사가
“도리어 너무 빠르지 않느냐?”하시니
“본래 스스로 움직인 것도 아닌데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조사께서 “누가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가?”하시니
“스승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하였다. 조사께서
“네가 완전히 무생의 뜻을 얻었도다.”하시니
“무생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하므로
“뜻이 없으면 누가 마땅히 분별하겠느냐?”하시니
“분별도 또한 뜻이 아닙니다.”하였다. 조사가 이르시기를
“착하도다. 하룻밤이라도 쉬어 가도록 하라.”하셨다.
그때의 일로 그를 일숙각(하룻밤 자고 깨달은 분)이라 하였는데 뒤에 증도가를 지으니 세간에 성행하였다.
禪者智隍은 初參五祖하고 自謂已得正受라하야 菴居長坐을 積二十年이러니 師의 弟子玄策이 遊方이라가 至河朔하야 聞隍之名하고 造菴問云호대 汝在此하야 作什麽오 隍이 云入定이로다
策이 云汝云入定은 爲有心入耶아 無心入耶아 若無心入者인댄 一切無情草木瓦石이 應合得定이오 若有心入者인댄 一切有情含識之流亦應得定이로다
隍이 曰我正入定時에 不見有有無之心이로라
策이 云不見有有無之心인댄 卽是常定이어니 何有出入이리오 若有出入인댄 卽非大定이로다
隍이 無對라가 良久 問曰師嗣誰耶아 策이 云我師는 曹溪六祖시니라
隍이 云六祖는 以何爲禪定고 策이 云我師所說은 妙湛圓寂에 體用이 如如하야 五陰 本空하고 六塵이 非有가 不出不入하고 不定不亂하야 禪性이 無住라 離住禪寂하며 禪性이 無生이라 離生禪想하야 心如虛空호대 亦無虛空之量이니라
隍이 聞是說하고 徑來謁師한대 師가 問云仁者何來오 隍이 具述前緣한대 師가 云誠如所言이니 汝但心如虛空호대 不著空見하면 應用無碍하야 動靜無心하며 凡聖情忘하야 能所俱泯하며 性相如如하야 無不定時也리라
隍이 於是이 大悟하야 二十年所得心이 都無影響이러니 其夜에 河北士庶가 聞空中에 有聲云隍禪師가 今日에 得道라하더라 隍이 後에 禮辭하고 復歸河北하야 開化四衆하니라
선자 지황은 처음 오조를 참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이미 삼매를 얻었다 하며 암자에서 20년 동안이나 장좌불와를 하고 있었는데 조사의 제자인 현책이 사방을 다니다가 하삭(땅이름)에 이르러서 지황의 이름을 듣고 암자로 찾아가
“그대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십니까?”하니 황이 말하길
“정에 듭니다.” 하므로
“그대가 정에 든다하니 마음이 있어 듭니까? 마음이 없어 듭니까? 만일 마음이 없이 든다 하면 일체 무정인 초목과 돌과 기왓장도 마땅히 정을 얻을 것이오, 만일 마음이 있어 든다 하면 알음알이가 있는 온갖 중생들도 마땅히 정을 얻을 것이 아닙니까?”하니
“내가 바르게 정에 들 때에는 <있다>, <없다>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하므로
“있다와 없다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이 곧 항상 정인데 어찌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있습니까? 만일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있다면 큰 정이 아닙니다.”하자, 황이 대답을 못하고 한참 있다가
“스님은 누구의 법을 이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의 스승은 조계의 육조대사입니다.”
“육조는 무엇으로 선정을 삼으십니까?”
“우리 스승의 설법은 묘하고 맑고 둥글고 고요하여 그 체와 용이 여여(如女)합니다. 오음(五蘊)이 본래 공하고 육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정(定)도 아니고 어지러운 것도 아닙니다. 참선의 성질은 머무름이 없는지라 고요한데 머무름을 떠났고 선의 성질은 생겨나는 것이 없는지라 선이라는 관념을 내는 것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지만 허공과 같다는 헤아림도 없습니다.” 황이 이 말을 듣고 바로 와서 조사를 찾아뵈니 조사가 물으셨다.
“인자는 어찌 왔는가?” 황이 지난번의 인연을 다 말씀드리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진실로 말한 바와 같다. 그대는 다만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되, 비었다는 소견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응용하여 걸림이 없으며, 움직임과 고요함에 마음이 없으며,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이 없어져 능(能: 主觀)과 소(所: 客觀)가 다 없어지며, 성품과 형상이 여여하여 정(定)이 아닌 때가 없으리라.”
황이 이에 크게 깨달아서 20년에 얻은 바 마음이 도무지 그림자 조차도 없었다. 그날 밤 하북 땅의 선비와 백성들이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황 선사가 오늘에야 도를 얻었다.”하였다.
지황이 뒤에 예배하고 하직하여 다시 하북으로 돌아가 사부대중을 교화하였다.
一僧이 問師云호대 黃梅意志를 甚麽人이 得이니잇고 師가 云會佛法人이 得이니라 僧이 云和尙은 還得否이까 師가 云我不會佛法이로라
師가 一日에 欲濯所授之衣하사대 而無美泉하야 因至寺後五里許하야 見山林이 鬱茂하며 瑞氣가 盤旋하고 師가 振錫卓地하신대 泉이 應手而出하야 積以爲池어늘 乃跪膝하고 浣衣石上이러시니 忽有一僧이 來하야 禮拜云方辯은 是西蜀人이라 昨於南天竺國에 見達磨大師러니 囑方辯하야 速往唐土호대 吾傳大迦葉의 正法眼藏과 及僧伽梨하야 見傳六代하니 於韶州曹溪에 汝去瞻禮하라하실새 方辯遠來로소니 願見我師의 傳來衣鉢하노이다
師乃出示하시고 次問上人은 攻何事業고 方辯이 曰善塑하노이다 師가 正色曰汝試塑看하라 方辯이 罔措하야 數日에 塑就眞相하니 可高七寸이오 曲盡其妙라 師가 笑曰汝只解塑性이오 不解佛性이로다 師가 舒手하야 摩方辯頂曰 永爲人天福田이어다
有僧이 擧臥輪禪師偈云호대 臥輪은 有伎倆하야 能斷百思想이라 對境에 心不起니 菩提日日長이라하야늘 師가 聞之曰此偈는 未明心地니 若依而行之하면 是加繫縛이라하시고 因示一偈曰
惠能은 沒伎倆하야 對境에 心數起어니 | 不斷百思想이라 菩提作麽長이리오 |
한 스님이 조사에게
“황매(5조)의 참 뜻을 어떤 사람이 얻었습니까?”라고 여쭈니 조사가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느니라.”하시자 그 스님이
“화상께서는 얻었습니까?” 하기에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하노라.”하셨다.
조사께서 하루는 전해 받으신 법의를 세탁하려 하셨는데 좋은 샘이 없어서 절 뒤로 5리쯤을 가시니 울창한 숲 속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음을 보시고 주장자를 떨쳐 세우시니 샘이 손을 따라 솟구쳐 올라 와 못이 되므로 무릎을 꿇고 돌 위에서 옷을 빨고 있었는데 홀연히 한 스님이 앞에 와서 예배하며 말하기를
“저는 방변이라 하는 서촉사람입니다. 어제 남 천축국에서 달마대사를 뵈었더니, 저에게 당부하시기를 「속히 당나라로 가거라. 내가 전한 대가섭의 정법안장과 승가리가 여섯 대를 전하여 소주의 조계에 있으니 네가 가서 참배하라.」하시기에 제가 멀리서 찾아 왔사오니 원하옵건대 전해져 내려오는 의발을 보여 주십시오.”하므로 조사가 내어 보이신 다음에 물으셨다.
“그대는 무슨 일을 익혔는가?” 방변이 말하기를
“소상을 잘 합니다.” 하므로, 조사가 정색을 하여
“네가 나의 모습을 한번 만들어 보아라.” 하시니 방변이 망설이다가 수일만에 조사의 실제 모습을 만드니 높이가 7촌이고 아주 절묘하고 세밀하였다. 조사에게 바쳐 드리니 조사가 웃으시며
“네가 다만 흙을 빚는 도리만 알고 불성은 모르는구나.”하시며 손을 펴서 방변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셨다.
“영원히 인간과 천상의 복전이 되어라.”
한 스님이 와륜 선사의 게송이라 하며 외우기를 「와륜은 기량이 있어서 능히 백가지 사상을 끊는지라.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보리가 나날이 자라난다.」하므로 조사가 듣고 말씀하시기를
“이 게는 마음자리를 밝히지 못했으니 만일 이대로 행하면 곧 얽히기만 더 하리라.”하시며 한 게송을 말씀하셨다.
혜능은 기량이 없어서 백가지 사상을 끊지 않았네.
경계를 대하면 마음이 자주 일어나니 보리가 어찌 자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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