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 祖 法 寶 壇 經
門人 法海 集
後學 宅成 譯
同學 智首 校
第八 頓漸品(제팔 돈점품)
時에 祖師는 居曹溪寶林하시고 神秀大師는 在荊南玉泉寺하시니 于時에 兩宗이 盛化하야 人皆稱南能北秀라 故로 有南北二宗頓漸之分하야 而學者莫知宗趣러니 師가 謂衆曰法本一宗이로대 人有南北이요 法卽一種이로대 見有遲疾이니 何名頓漸고 法無頓漸이언마는 人有利鈍일새 故名頓漸이니라
然이나 秀之徒衆이 往往譏南宗祖師가 不識一字어니 有何所長이리오한대 秀가 曰他得無師之智하야 深悟上乘하니 吾不如也요 且吾師五祖가 親傳衣法하시니 豈徒然哉아 吾恨不能遠去親近하고 虛受國恩하노니 汝等諸人은 無滯於此하고 可往曹溪하야 叅決이어다 一日命門人志誠曰汝聰明多智하니 可爲吾하야 到曹溪聽法이니 汝若聞法이어니 盡心記取하야 還爲吾說하라
때에 조사는 조계 보림에 계시고 신수대사는 형남 옥천사에 계셨다. 그때에 두 종이 모두다 성대히 교화하니 사람들이 모두 남능과 북수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남과 북의 두 종이 돈과 점으로 갈라졌는데 배우는 사람들은 근본취지를 몰랐으므로 조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법은 본래 한 종이거만 사람이 남북을 둔 것이다. 법은 곧 한가지인데 보는 것이 더디고 빠를 수 있다. 무엇을 <돈>이라 하고 무엇을 <점>이라 하는가 하면 법은 돈과 점이 없는데 사람에게는 영특함과 둔함이 있으므로 <돈>이로 <점>이라 한다.”
그러나 신수의 대중들은 이따금 남종의 조사는 한 글자도 모르니 무엇이 그이 대단하겠느냐하며 비방하였는데 신수대사는 말하기를
“그 분은 스승이 없는 지혜를 얻어서 상승의 법을 깊이 깨달았으니 나는 그 분만 못하다. 또 나의 스승인 오조께서 친히 가사와 법을 전하셨으니 어찌 공연한 일이겠느냐. 내가 멀리 가서 친견하지 못하고 헛되이 나라의 은혜만 받고 있어 한스러우니 너희들은 이곳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조계에 가서 배우도록 하여라.”하며 어느 날 문인인 지성에게 명하기를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에 가서 법을 듣고, 들은 법은 마음을 다하여 기억해 두었다가 돌아와서 나를 위해 설하여 달라.”하였다.
志誠이 稟命하고 至曹溪하야 隨衆參請호대 不言來處러니 時에 祖師가 告衆曰今有盜法之人이 潛在此會로다 志誠이 卽出禮拜하고 具盡其事한대 師가 曰汝從玉泉來하니 應是細作이로다 對曰不是니이다 師가 曰何得不是오 對曰未說卽是어니와 說了不是니이다 師가 曰汝師가 若爲示衆고 對曰常指誨大衆하사대 住心觀靜하야 長坐不臥라하시더이다
生來에 坐不臥하고 一具臭骨頭가 | 死去에 臥不坐하니 何爲立功課리오 |
師가 曰住心觀靜은 是病이라 非禪이오 長坐拘身이 於理에 何益이리오 聽吾偈하라 曰
志誠이 再拜曰弟子가 在秀大師處하야 學道九年에 不得契悟러니 今聞和尙의 一說하고 便契本心이라 弟子가 生死事大하니 和尙은 大慈로 更爲敎示하소서
지성이 명을 받고 조계에 이르러서 대중을 따라 참례하고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 때 조사가 대중에게
“지금 법을 도적질하는 사람이 이 모임에 숨어 있다.”하시므로 지성이 곧 나와서 예배하고 그간의 일을 다 말씀드리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옥천에서 왔으니 필시 염탐꾼이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말씀드리지 않았을 때는 그러합니다만 말씀드렸으니 그렇지 않습니다.”
“너의 스승은 어떻게 대중을 가르치시는가?”
“항상 대중을 가르치시기를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마음으로 살피어보고 장좌하여 눕지 말라.」하셨습니다.”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 한 덩어리 냄새나는 뼈다귀가 어찌 공과를 세우리오. |
“마음을 머물러서 고요함을 관하는 것은 병이지 선이 아니며 마냥 앉아 있는 것은 몸을 구속하는 것이니 이치에 무엇이 이익이 되겠느냐.”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지성이 다시 절하며 말하였다.
“제자가 신수대사의 처소에 있으면서 도를 배운지 9년이나 되었으나 깨닫지 못하였는데 지금 화상의 한 말씀을 듣고 문득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제자에게 생사의 일이 크니 화상께서 대 자비로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십시오.”
師가 曰吾聞汝師가 敎示學人戒定慧法이라하니 未審汝師의 說戒定慧行相이 如何오 與吾說看하라
誠이 曰秀大師가 說諸惡莫作이 名爲戒요 諸善奉行이 名爲慧요 自淨其意가 名爲定이라하시니 彼說은 如此어니와 未審和尙은 以何法誨人이니잇고
師가 曰吾若言有法與人인댄 卽爲誑汝니 但且隨方解縛이 假名三昧라 如汝師所說戒定慧는 實不可思議어니와 吾所見戒定慧는 又別이니라
志誠이 曰戒定慧는 只合一種이어니 如何更別이리잇고 師가 曰汝師戒定慧는 接大乘人이오 吾戒定慧는 接最上乘人이니 悟解가 不同일새 見有遲疾이니라
汝聽吾說하라 與彼同否아 吾所說法은 不離自性이니 離體說法이 名爲相說이라 自性을 常迷니 須知一切萬法이 皆從自性起用이 是眞戒定慧法이니라 聽吾偈하라 曰
心地無非가 自性戒요 心地無癡가 自性慧요 心地無亂이 自性定이오 不增不減이 自金剛이오 身去身來이 本三昧니라 |
誠이 聞偈悔謝하야 乃呈一偈호대 曰
五蘊幻身이여 廻趣眞如하면 | 幻何究竟이리오 法還不淨이니이다 |
“내가 들으니 너의 스승은 학인들에게 계 · 정 · 혜의 법을 가르친다 하시던데 알지 못하겠으니 너의 스승이 계 · 정 · 혜를 어떻게 설하시는지 내게 말해 보아라.”
“신수대사께서는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을 계라 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이라 이름한다.」라고 설하시는데, 화상께서는 어떠한 법으로 사람을 가르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만일 사람에게 줄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곧 너를 속이는 것이 되느니라. 단지 경우를 따라 얽힘을 풀어줄 뿐인데 이름을 빌려 말한다면 삼매라 하느니라. 너의 스승이 말씀하시는 계 · 정 · 혜는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내가 보는 계 · 정 · 혜와는 다르구나.”
“계 · 정 · 혜는 다만 한 가지인데 어찌 다를 수 있습니까?”
“너의 스승의 계 · 정 · 혜는 대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지만 나의 계 · 정 · 혜는 최상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깨달아 앎이 같지 않으므로 지견이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너는 내가 말하는 것이 그와 같은지 다른지 들어보아라.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체(體)를 여의고 법을 설하는 것을 상으로 설하는 것이라 하는데 자성을 항상 미혹하게 하느니라. 모름지기 알아라. 일체의 만법이 모두 다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느니라. 이것이 참된 계 · 정 · 혜의 법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마음자리에 잘못 없는 것이 자성의 계요, 마음자리에 어리석음 없는 것이 자성의 혜요, 마음자리에 어지러움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며 더하지도 않고 덜 하지도 않는 것이 자기의 금강이요, 몸이 가고 몸이 옴이 본래 삼매이니라. |
지성이 게송을 듣고 뉘우쳐 감사하며 한 게송을 바치었다.
오온의 허깨비 몸이여 허깨비가 어찌 구경이리요, 진여로 돌이켜 나아가면 법이 도리어 깨끗하지 못하리. |
師가 然之하시고 復語誠曰汝師戒定慧는 勸小根智人이오 吾戒定慧는 勸大根智인이니 若悟自性하면 亦不立菩提涅槃이며 亦不立解脫知見이라 武一法可得하야사 方能建立萬法이니 若解此意하면 亦名佛身이며 亦名菩提涅槃이며 亦名解脫知見이라 見性之人은 立亦得不立亦得이니 去來自由하야 無滯無礙하야 應用隨作과 應語隨答에 普見化身호대 不離自性하야 卽得自在神通과 遊戱三昧가 是名見性이니라
志誠이 再啓師曰 如何是不立義니잇고 師가 曰自性이 無非無癡無亂하야 念念般若觀照하야 常離法相하야 自由自在하야 縱橫盡得이어니 有何可立이리오 自性自悟하야 頓悟頓修일새 亦無漸次니 所以로 不立一切法이니라 諸法이 寂滅이어니 有何次第이오 志誠이 禮拜하고 願爲執侍하야 朝夕不懈러라
조사가 “그렇다.”하시고 다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네 스승의 계 · 정 · 혜는 작은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고 나의 계 · 정 · 혜는 큰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만일 자기의 성품을 깨닫고서 보리나 열반을 세우지 않고 또한 해탈지견도 세우지 않으면 한 법도 가히 얻을게 없어서 바야흐로 만법을 세울 수 있느니라.
만일 이 뜻을 알면 이것을 부처님의 몸이라 하며 보리와 열반이라 하며 해탈지견이라 하느니라.
견성한 사람은 세워도 되고 세우지 않아도 되니 가고 옴이 자유로워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경우에 따라 작용을 하고 물음에 따라 답하며 널리 화신을 나타내지만 자성을 여의지 않으므로 곧 자재한 신통과 유희하는 삼매를 얻는다. 이것을 견성이라 이름하느니라.” 지성이 다시 조사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조사가 말씀하셨다.
“자성은 그릇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어서 생각 생각이 반야로 비추어 보아 항상 법이라는 생각을 여의고 자유자재하며 가로 세로 모두 얻으니 무엇을 세우겠느냐. 자성을 스스로 깨달아서 몰록 깨닫고 몰록 닦으면(돈오 돈수) 늦고 더딤이 없으므로 일체 법을 세우지 않느니라. 모든 법이 적멸한데 무슨 순서가 있겠는가?”
지성이 예배드리고 모시기를 원하여 아침저녁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一僧志撤은 江西人이니 本姓은 張이오 名은 行昌이라 少에 任俠이러니 自南北分化로 二宗主는 雖亡彼我나 而徒侶가 競起愛憎이라 時에 北宗門人이 自立秀師하야 爲第六祖호대 而忌祖師傳衣가 爲天下所聞하야 乃囑行昌하야 來刺於師할새 師가 心通으로 預知其事하시고 卽置金十兩於座間이러시니 時夜暮에 行昌이 入祖室하야 將欲加害어늘 師가 舒頸就之하신대 行昌이 揮刃者가 三이로대 悉無所損이어늘 師가 曰正劍은 不邪하고 邪劍은 不正이니 只負汝金이오 不負汝名이로라
行昌이 驚仆라가 久而方蘇하야 求哀悔過하야 卽願出家한대 師遂與金言하사대 汝且去하라 恐徒衆이 翻害於汝하노니 汝可他日에 易形而來하면 吾堂攝受호리라 行昌이 稟旨宵遁하야 後에 投僧出家하야 具戒精進이러니 一日에 憶師之言하야 遠來禮覲한대 師가 曰吾久念汝러니 如來何晩고 曰昨蒙和尙의 捨罪하야 今雖出家苦行이나 終難報德이니 其惟傳法度生乎인저 弟子가 嘗覽涅槃經이나 未曉常無常義로소니 乞和尙은 慈悲로 略爲解說하소서 師가 曰無常者는 卽佛性也요 有常者는 卽一切善惡諸法의 分別心也니라 曰和尙所說이 大違經文이로소이다 師가 曰吾傳佛心印이어니 安敢違於佛經이리오 曰經에 說佛性이 是常이어늘 和尙은 却言無常하시며 善惡之法과 乃至菩提心이 皆是無常이어늘 和尙은 却言是常하시니 此卽相違라 令學人으로 轉加疑惑이로소이다
師가 曰涅槃經을 吾昔에 聽尼無盡藏의 讀誦一徧하고 便爲講說호대 無一字一義도 不合經文이며 乃至爲汝에도 終無二說이니라
曰學人이 識量이 淺昧하니 願和尙은 委曲開示하소서 師가 曰汝知否아 佛性이 若常인댄 更說什麽善惡諸法이리오 乃至窮劫하야도 無有一人도 發菩提心者라 故로 吾說無常이 正是佛說眞常之道也오 又一切諸法이 若無常者인댄 卽物物이 皆有自性하야 容受生死하야 而眞常性이 有不徧之處라 故로 吾說常者가 正是佛說眞無常義니라
佛이 比爲凡夫外道는 執於邪常하고 諸二乘人은 於常에 計無常하야 共成八倒일새 故로 於涅槃了義敎中에 破彼偏見하사 而顯說眞常眞樂眞我眞淨이러시늘 汝今依言背義하야 以斷滅無常과 及確定死常으로 而錯解佛之圓妙한 最後微言하니 縱覽千徧인들 有何所益이리오 行昌이 忽然大悟하야 乃說偈言호대
因守無常心하야 不知方便者는 我今不施功하고 非師相授與며 | 佛說有常性이어시늘 猶春池拾礫이로다 佛性이 而現前하니 我亦無所得이로다 |
師가 曰汝今撤也니 宣名志撤니이라 撤이 禮謝而退하다
지철스님은 강서 사람이다. 본성은 장씨이고 이름은 행창인데 젊어서는 불한당이었다. 남북이 나뉘어 교화하였지만 두 종주은 네 편, 내 편이 없었는데 그 문도 들은 서로 다투며 미워하였다. 그때에 북종의 문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신수대사를 육조로 삼았으며 조사에게 가사가 전해진 것을 천하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서 행창을 시켜 조사를 해치려 보냈는데 조사께서는 타심통으로 그 일을 미리 아시고 금열 냥을 자리사이에 준비하여 두고 계셨다.
밤이 깊어져 행창이 조사의 방에 들어와 해치려하니 조사가 목을 쭉 내미시므로 행창이 칼을 세 번이나 휘둘렀으나 조금도 다치지 않으셨는데 조사께서
“바른 칼은 삿되지 않고 삿된 칼은 바르지 못하니라. 너에게 전생에 돈은 빚졌지만 목숨은 빚지지 않았느니라.”하시니 행창이 놀라 자빠졌다가 한참 만에 깨어나 슬피 울며 잘못을 뉘우치며 출가를 원하였으나 조사가 금을 주시며 말씀하시길
“너는 우선 가거라. 대중들이 도리어 너를 해칠까 걱정되니 네가 다른 날에 모습을 바꾸어 오면 내가 마땅히 받아 주겠노라.”하셨다.
행창이 조사의 뜻을 받들어 달아났다가 다른 스님을 의탁하여 출가한 뒤, 계를 갖추어 정진하다가 어느 날 조사의 말씀을 기억하고 멀리서 찾아와 절하고 뵈었다. 조사께서
“내가 너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 이리 늦었는가?”하시니
“예전에 화상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신 덕분에 지금은 비록 출가하여 고행을 하지만 그 은덕을 갚기가 어렵습니다. 은덕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열반경을 보았으나 상(常)과 무상(無常)의 뜻을 깨닫지 못하겠으니 비옵건데 화상께서 자비를 베풀어 간략히 가르쳐 주십시오,”하였다. 이에 조사가
“무상이라는 것은 곧 불성이고, 유상이라는 것은 일체 선과 악의 모든 법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하시니
“화상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경문에 크게 어긋납니다.”하므로 조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데 어찌 감히 불경을 어기겠느냐?” 그러자
“경에는 불성이 곧 상이라 하였는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무상이라 말하시며 선악의 법과 보리심이 다 무상인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상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서로 틀리는 것이라 학인으로 하여금 점점 더 의심스럽게 합니다.”하므로 조사가 말씀하셨다.
“열반경은 내가 옛적에 무진장이라는 비구니가 독송하는 것을 한번 듣고 곧 그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한 글자, 한 뜻도 경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너에게도 두 가지 말이 있을 수 없느니라.”
“제가 아는 것이 얕고 어두우니 원컨대 화상께서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네가 아느냐? 불성이 만일 상(常)이라면 다시 어떻게 선과 악의 모든 법을 설하겠느냐? 한량없는 세월을 다 하더라도 보리심을 일으킬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설하신 참된 상(常)의 도리이니라. 또 일체의 모든 법이 만일 무상(無常)이라면 곧 물건마다 모두 자기의 성품이 있어서 생과 사를 받아들이므로 참된 상의 성품이 두루 하지 못하는 곳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상이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무상의 뜻이니라. 부처님께서 평소에 범부와 외도들은 삿된 상(常)에 빠지고 이승의 사람들은 상을 무상으로 알아서 다 같이 여덟 가지 뒤집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열반 요의교를 말씀하시는 가운데에 그런 편견을 없애고자 진상(眞常)과 진락(眞樂)과 진아(眞我)와 진정(眞淨)을 밝혀 말씀하셨는데 네가 그 말만 의지하여 뜻을 잘못 알고 아무것도 없는 덧없음과 헛된 있음(死常)으로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최후의 미묘한 말씀을 잘못 이해하니 비록 천 번을 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행창이 그 순간 크게 깨달아서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무상의 마음을 지킴으로 인하여 부처님이 유상의 성품을 설하셨는데 방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봄 못 속에 조약돌 주음과 같았다. 내가 이제 아무런 공을 들이지 않았는데 불성이 앞에 나타나니 스승이 주신 것도 아니고 나도 또한 얻은 바가 없도다. |
조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똑똑히 알았으니 마땅히 이름을 지철이라 하여라.”
지철이 절하고 감사하며 물러갔다.
有一童子호대 名이 神會니 襄陽高氏의 子라 年이 十三에 自玉泉來하야 參禮한대 師가 曰知識아 遠來艱辛하니 還將得本來否아 若有本則合識主니 試說看하라
會가 曰以無住로 爲本이니 見卽是主니이다 師가 曰這沙彌가 爭合取次語오 會가 乃問曰和尙이 坐禪하시니 還見가 不見이니이까 師가 以拄杖으로 打三下하신대 云吾打汝하니 痛가 不痛가 對曰亦痛亦不痛이니이다 師가 曰吾亦見亦不見이로라
神會가 文如何是亦見亦不見이니잇고 師言하사대 吾之所見은 常見自心過愆하고 不見他人의 是非好惡일새 是以로 亦見亦不見이어니와 汝言亦痛亦不痛은 如何오 汝若不痛인댄 同其木石이오 若痛인댄 則同凡夫하야 卽起恚恨이니 汝向前에 見不見은 是二邊이오
痛不痛은 是生滅이라 汝自性을 且不見하고 敢爾戱論가 神會가 禮拜悔謝한대 師가 又曰汝若心迷不見인댄 問善知識覓路요 汝若心悟인댄 卽自見性하야 依法修行이어늘 汝自迷하야 不見自心하고 却來問吾의 見與不見가 吾見自知어니 豈代汝迷며 汝若自見인댄 亦不代吾迷어늘 何不自知自見하고 乃問吾의 見與不見고 神會가 再禮百餘拜하야 求謝過愆하고 服勤給侍하야 不離左右러라
동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이름이 신회이고 양양 고씨의 자손이었다. 나이 13세에 옥천사로부터 참배하니 조사가
“선지식아, 멀리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근본은 얻어 가지고 왔느냐? 만일 근본이 있다면 당연히 주인을 알 것이니 한번 말해 보아라.”하시니 신회가 말하기를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보는 것이 곧 주인입니다.”하므로
조사께서 “이 사미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하셨는데
“화상께서는 좌선하실 때 보십니까? 보시지 않습니까?”하므로 주장자로 세 번이나 때리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때렸는데 아프냐? 아프지 않느냐?”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나도 역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묻기를
“어떤 것이 또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하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보는 것은 항상 자기 마음의 허물만 보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보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이니라. 네가 말한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네가 만일 아프지 않다면 나무나 돌과 같고 만일 아프다면 곧 범부와 같아서 곧 성내고 원한을 일으킬 것이니 네가 아까 보거나 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두 가지 극단이다. 아프거나 아프지 않다고 하는 것은 생 · 멸이니라. 네가 자성을 아직 보지 못하였으면서 감히 그렇게 희롱하듯이 말하느냐?”
신회가 뉘우치며 절하고 사과하였다. 조사가 또 말씀하셨다.
“네가 만일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한다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야 하고 네가 만일 마음을 깨달았다면 곧 스스로 성품을 보고 법대로 수행하여야 할 것인데, 너는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으면서도 도리어 나에게 와서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나의 봄은 스스로 아는데 어찌 너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네가 만일 스스로 보더라도 나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는데,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여 스스로 보지 못하면서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다시 백여 번 절을 하며 허물을 사죄하였고 부지런히 모시며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一日에 師가 告衆曰吾有一物호대 無頭無尾하여 無名無字하며 無背無面하니 諸人은 還識否아 神會가 出曰是諸佛之本源이오 神會之佛性이니이다 師가 曰向汝道無名無字어늘 汝便喚作本源佛性하니 汝向去하여 有把峁蓋頭라도 也只成箇知解宗徒리라 祖師滅後에 會入京洛하야 大弘曹溪頓敎하고 著顯宗記하야 盛行于世하니라
師가 見諸宗이 難問에 咸起惡心하야 多集座下하시고 愍而謂曰學道之人이 一切善念惡念을 應當盡除하야 無名可名을 名於自性無二之性이니 是名實性이라 於實性上에 建立一切敎門이니 言下에 便須自見이니라 諸人이 聞說하고 總皆作禮하야 請事爲師하니라
어느 날 조사가 대중에게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등도 없고 얼굴도 없으니 너희들은 알겠느냐?”하시니 신회가 나와서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며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므로 조사가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 하였는데 네가 문득 근본이며 불성이라고 하니 너는 어디 가서 지도자가 되더라고 한낱 지해종도(知解宗徒: 안다는 확신을 내세워 이름이나 글자의 집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무리)밖에 만들지 못하겠구나.”
신회는 조사가 돌아가신 후에 서울에 들어가서 조계의 돈교를 크게 넓히고 현종기(顯宗記)를 지으니 세상에 유행하였다.
조사께서는 여러 종파들이 힐난하면서 모두가 나쁜 마음을 품고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며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일체의 착한 생각과 악한 생각을 마땅히 다 없애어서 무어라 이름할 것이 없어야 자성의 둘이 없는 성품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실다운 성품이라 하느니라. 실다운 성품 위에 일체의 교문(敎門)을 세우는 것이니 말 아래에 모름지기 스스로 볼지어다.”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다 예를 드리고 스승으로 모시기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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