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 닦기와 복福 닦기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행복해지고 싶으나 방법에 대하여서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 지는 잘 모릅니다.
방법은 두 가지, 도 닦기와 복 닦기입니다.
도 닦기와 복 닦기를 하지 않으면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일시적인 행복감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멘토mentor가 좋은 얘기를 해주거나,
좋은 책을 보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 편안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며칠, 아니 조금만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어버립니다. 일회용 밴드식 처방이지요.
근원적인 처방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욕심 줄이기 도 닦기, 또 하나는 소유 늘리기 복 닦기입니다.
『법구경』에 보면, “행복으로 가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첫 번째가 천상으로 사는 길이고, 두 번째가 해탈로 가는 길이다.”라고 했습니다.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서 천상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탈로 가려면 도를 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것들은 일시적인 행복감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지지만, 그다음 날 일어나면 ‘아이고 머리야~.’하고 기운이 빠집니다.
또 마약을 하고 나면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이고 행복하게 느낄지는 모르겠으나,
깨고 나면 더 허탈해서 다시 찾게 되고, 그러는 사이 점점 몸과 마음과 재물을 피폐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근원 처방은 도 닦기와 복 닦기밖에 없습니다.
도 닦기의 핵심은 관찰이고, 복 닦기의 핵심은 보시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은 중생들은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길을 떠나라. 나도 그러하리라.”하고 전도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부처님도, 하느님도, 신들도 여러분을 대신해서 행복해 줄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직접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부처님은 다만 그 길을 가르쳐 줄 뿐입니다.
천상에 가고 싶으면 복을 닦고, 복을 닦으려면 보시를 하라고 합니다.
보시를 하는 것이 복을 닦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그다음 해탈로 가려면 도를 닦으라고 합니다.
산중의 스님들이나 도를 닦는 것이지,
속세에 찌든 우리가 무슨 도를 닦을 수 있겠느냐고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찰만 하면 그것이 도를 닦는 것입니다. 관찰하는 것이 마음을 닦는 것이니까요.
『금강경』에서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화엄경』에서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관觀, 견見이 바로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우선 별명을 하나 설정하겠습니다. 무엇이던지 어떤 것이던지 다 되고 좋습니다.
지금 ‘짱구’라는 닉네임을 붙여가지고 해 보겠습니다. ‘짱구가 화를 내려고 하는구나.’하고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또 하나는 별명 대신 육근의 무더기라는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육근六根이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여섯 가지 우리가 몸이라고 생각하는 여섯 가지 근본적인 기관입니다.
해서 우리는 눈=안眼, 귀=이耳, 코=비鼻, 혀=설舌, 몸=신身, 뜻=의意가 모여서 형성된 것이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화가 나거나 욕심이 생기면,
‘육근의 무더기가 화를 내는구나. 욕심을 부리는 것도 육근의 무더기이지, 내가 욕심을 보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어떤 분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엄해서 어렸을 때부터 위축되어 있었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두려움에 떠는 마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트라우마는 그냥 놔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잠복해 있다가 때가 되면 나타납니다. 그리고 죽을 때 가지고 갑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이것을 치유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관찰하기입니다.
‘육근의 무더기가 아니면 짱구가 아버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구나.’ 하고
관찰하는 순간 내 트라우마가 아니라 육근무더기, 또는 짱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TV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주인공이 “나 떨고 있니?” 그러잖아요, 그러면 절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육근의 무더기가 떨고 있니?” 이래야 합니다.
‘나’라고 하지 말고 별명을 붙여서 ‘짱구가 떨고 있구나. 육근의 무더기가 떨고 있구나.’하고 자꾸 연습해야 합니다.
그럼 아버지에 대해 떨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육근의 무더기가 떨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는 것이죠.
나는 육근의 무더기가 떨고 있는 것을 관찰하는 입장에 서 있게 됩니다. 그래야 트라우마를 치유할 구 있습니다.
입장이 바뀌어 객관화되니까 다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관화되어 있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트라우마를 없애고 근원 치우를 하려면 과거의 생과 금생과 내생인 삼세인과를 놓고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관찰이라는 수행을 통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려면 복 닦기와 도 닦기를 꼭해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불교의 키워드입이다. 월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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