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집에서 하루속히 벗어나려면
마음 닦는 요결要訣은 무엇일까? 만약 닦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깨달음의 본래자리에서 멀어진다면 어떻게 수행을 지어갈 것인가? 참선수행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직면하게 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법석이 마련됐다.
금정총림의 방장이신 지유스님은 범어사 침계루에서 500여 사부대중에게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역작인 『수심결修心訣』에 대한 감로법문을 펼쳤다. 스님은 자상하고 경쾌한 어조로 선종특유의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선지先知를 밝혔으며, 첨예한 돈점頓漸의 논쟁에 대해서는 간단명료한 해석을 내렸다.
『수심결修心訣』은 고려중기 보조 지눌스님이 직지인심直指人心과 돈오점수頓悟漸修, 정혜쌍수定慧雙修들을 통해 일체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불성을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 논한 저서로 문장이 간결하고 논리적이어서 참선입문서로 널리 읽혔다. 서두와 권결勸結을 제외한 본문은 질의응답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본지는 ‘깨달음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지유스님의 수심법문修心法門을 2회에 걸쳐 지상 중계한다. - 글 박지원 기자(현대불교신문) -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과연 최고의 행복은 무엇일까?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과 아름다운 배우자를 다 가지면 행복할까? 그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안심처安心處는 아닙니다. 돈과 명예, 권력과 아름다운 배우자를 모두 가진 다해도 죽음은 피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누구나 예외 없이 격어야 한다는 것,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죽음에 직면해서는 사랑하는 가족을 비롯한 그 어떤 사람이나 억만금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보면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 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가 자신인 줄 알고 성형수술도 하고 온갖 치장도 하며 삽니다만, 죽으면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大로 흩어지기 시작하면 썩어가는 몸뚱이에서는 구더기만 들 끊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흩어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인가?’
이런 바탕에서 ‘아하, 마음을 깨달아야겠구나. 마음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아닌가.’하는 인식이 생겼고, 마음은 끝없는 과거부터 한 번도 태어난 바 없고 죽은 바도 없는 불생불멸의 존재이어서 자신의 마음자리를 완전하게 깨달으면 생사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범부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육신이 늙고 병드니까 자기도 늙고 병들어 결국 죽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죽은 자에게 이 문제에 관해 물어보려고 해도 죽은 자와는 통화가 안 되니 알 길이 없군요.
삼계 속에서 윤회하는 고통은 마치 ‘불차는 집(火宅)’과 같아서 하루속히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처를 구하는 것이 긴요한데, 부처란 곧 본래마음이니 먼데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마음밖에 따로 부처가 있다고 믿는다면 무량겁無量劫을 지나도록 장좌불와하거나, 하루 한 때만 식사하거나, 몸을 태우거나, 피를 뽑아 경經을 베끼는 등 온갖 고행苦行을 해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옛적에 이견왕이 바라제존자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으니 존자가
“성품을 보면 부처입니다.”하고 답하자. 왕은 다시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고, 존자는
“성품은 작용하는데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왕은 이어
“만일 작용할 때는 몇 군데에 나타납니까?”라고 다시 묻자. 존자가
“태胎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처處하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하고, 코에 있으면 ‘냄새 맡는다.’하고, 혀에 있으면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쥐’고, 다리에 있으면 ‘움직여’ 달리니, 나타나면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를 두루 싸고, 거두어들이면 한 작은 티끌 속에 있으니 나는 사람은 이것을 불성佛性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精魂이라고 합니다.”라고 답하니, 왕은 이 법문을 듣고 마음이 열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화상이 답하기를
“내가 너에게 말해주고자 하나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스님이 말하기를
“화상의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하자 스님은
“바로 너 이니라.”하고 단언했습니다. 스님이
“어떻게 보임保任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화상은
“한 티끌이라도 눈에 있으면 공화空華가 어지러이 떨어지니라.”했습니다.
이 말 끝에 스님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시 같이 있고 항상 사용하는 이 마음을 망각하고 삽니다. 일상 속에서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알고, 목마르면 목마른 줄 알고, 잠 오면 잠 오는 줄 아는 바로 이것인데 말입니다. 임제스님은 눈앞에 또렷하게 홀로 밝으면서도 모양 없는 자가 있는 바, 이것이 법인法印이며 본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본래 마음이 늘 우리와 함께 있는데도 이를 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누구나 갖추고 있는 불생불멸의 마음자리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망상妄想과 집착執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짙은 안개가 끼면 눈앞의 사물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망상 • 번뇌를 모두 놓아버리면 단박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깨닫고 보면 본래 성불입니다. 안개가 걷히면 본래 그 자리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지 새로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부단히 노력해서 차츰차츰 부처의 지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내가 부처임을 단박에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오頓悟입니다. ‘본래 그 속에서 행주좌와하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었구나.’, ‘아깝다. 매일 차茶를 마시면서 차를 마시는 줄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빙그레 웃게 됩니다. 차가우면 차가운 줄 알며, 아프면 아픈 줄 알고, 가려우면 가려운 줄 아는…이 놈, 이~ 하는 이 놈,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 간단한 이치理致를 알려줘도 믿지 않으니 함부로 말을 못합니다. 오히려 선지식先知識을 비방誹謗하고 욕하다가 그 과보果報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게 되니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에 맞게 팔 만 사천의 방편 법문을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조사스님들은 믿거나 말거나 비방하거나 말거나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핵심을 바로 일러 주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죽도록 노력해야만 깨닫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깨달음은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바늘로 허벅지를 찔렀을 때 아픔을 느낄 줄 아는 자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머리 좋고 나쁜 것이나, 수학을 잘하고 못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깨달음과 신통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흔히들 깨달으면 온갖 신통을 갖춘 비범한 인물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깨닫는다고 특별히 다른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키 작은 사람이 깨닫는다고 키 큰 사람이 되는 것 아니며, 작은 눈을 가진 사람이 깨닫는다고 해서 갑자기 눈이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소금에서 단맛이 나도록 만드는 것이 깨달음일까요? 아닙니다. 소금이 짠 줄 알고 꿀이 단 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불법은 공부를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이 짜고 꿀이 단 것을 공부해서 아는 것입니까?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리나 빛, 냄새, 맛 등 모두 진리眞理아님이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려는 취사取捨 · 분별分別의 마음 때문에 도道속에 있으면서도 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물속에 있으면서도 물맛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자들은 오매寤寐일여一如를 위해 늘 화두話頭나 염불念佛같은 수행修行방편方便을 들고 있습니다. 깨달은 자는 어떻게 할까요? 또한 깨달은 자의 생활은 어떠할까요? 깨달은 자들도 범부들과 똑같이 배고플 때 밥 먹고, 일할 때 일하고, 잠 올 때 잠을 잡니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성인과 범부가 같습니까?” 선지식이 대답했습니다.
“똑 같다.”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다릅니까?” 선지식이 대답했습니다.
“깨달은 자는 밥 먹을 때 분명히 밥 먹고, 일할 때 분명히 일하며, 잠 올 때 분명히 잠을 잔다.”
그러나 범부들은 한 가지 일할 때도 여러 가지 망상들이 오락가락합니다.
‘똥과 밥이 하나다.’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옛날에는 논에 거름을 똥으로 주어 볍씨에 영양을 공급했고, 그 볍씨가 커서 쌀알을 맺으면 다시 사람이 먹는 유기적 순환관계를 가졌을 때도 있었습니다만 눈앞의 밥과 똥은 확연히 다릅니다. 하지만 깊이 사색해보면 둘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도 역시 모습은 다르지만 근본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새로 태어날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 죽음은 축복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고, 반대로 태어남으로써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니 갓난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슬피 우는지도 또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들어가다 보면 선악善惡은 없어지고 취取하고 버릴 것捨은 사라집니다. 있는 그대로 보면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고,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사량 분별思量分別을 놓으면 실체實體가 보입니다. 여기가 부동不動의 자리입니다.
조사스님들은 ‘도道를 이루려면 자기 마음을 돌이켜 보라.’고 했습니다.
성품을 찾기 위해 밖으로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안식처安息處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안으로 뒤져봐도 발견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제자가 선지식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찾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디 길을 일려 주십시오.” 선지식이 물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는가?” 제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자. 선지식은
“더 이상 공부하지 마라. 일체를 놓고 내일 아침 동틀 때까지 그냥 앉아 있어보라.” 제자는 일체의 생각과 의도를 쉬고 마냥 편안하게 앉아있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쿵’하고 울려 펴졌습니다. 그 종소리에 그만 제자는 홀연히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아! 종소리였구나. 도道아닌 게 없고 진리眞理아닌 게 없는데, 나 스스로 가리고 있었구나.’, ‘구하면 구할수록 찾으면 찾을수록 멀어지는구나.’하고 여기서 탁 계합契合했습니다.
생각이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나 금언金言이라고 들고 있으면 진리의 눈을 가리게 됩니다. ‘금싸라기가 아무리 좋아도 눈에 들어가면 눈병이 난다.’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하는 마음, 머리 굴려 궁리하는 마음, 미워하고 집착하는 마음 등, 쉼 없이 들고 있는 마음이 본 성품을 가리고 있는 덮게입니다. 늘 무언가를 들고 있는 사람의 눈은 마치 썩은 동태 눈알처럼 게슴츠레하고 흐릿합니다. 그래도 들고 계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놓아버리고 있는 그대로 바로 보십시오. 놓아버리면 목전目前에 바로 보입니다. 벽이면 벽, 사람이면 사람, 꽃이면 꽃, 물건이면 물건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보입니다. 놓아버리고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면 대화하거나 일하는 가운데서도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참되고 무심無心하게 되어 이사무애理事無礙가 됩니다.
옛 스님들은 앉아 있는 것보다 일하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부처라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무심처大無心處에서 밭 갈고 씨 뿌리며 일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마음은 조금도 맺힌 바가 없이 활발발活潑潑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상 가운데서 일체 망상과 집착을 놓아버리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수행 즉 ‘닦음이 없는 닦음無修’이 ‘참된 수행眞修’입니다.
선지식은 말합니다. ‘공부를 던져버려라!’, ‘일체를 놓아버려라!’ 화두든 염불이든 들고 있으면 있는 그대로 듣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또렷하고 밝은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놓아라.’할 때 놓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어긋납니다. 놓는다는 생각 역시 본심을 가리는 장애障礙이기 때문입니다.
객승이 찾아와 선지식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엇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선지식이 대뜸
“놓아라!”했습니다. 객승이 말하기를
“다 놓았습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하니 선지식이
“들고 있지 말고 다 놓게 나!”하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객승이 따져 묻기를
“다 놓았는데 뭘 더 놓으라는 말씀입니까?” 선지식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놓기 싫으면 들고 있게 나!” 이 말 끝에 객승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일체의 구하는 마음을 쉬고, 놓는다는 생각조차 놓아야 티끌을 벗어난 할 일없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을 돌이켜 보십시오, 지금 있는 그대로 매순간 알아차려 나가면 됩니다. 알아차리면 놓아집니다. 조주선사는 객이 찾아오면 “차나 한잔하시게.”하며 차茶를 권하면서 차 맛을 제대로 아는가를 봅니다. 차 마시는데 일상의 견처見處가 드러납니다. 차를 마시는 자가 바로 자기입니다. 자기와 늘 함께 있으면서 “대체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남의 말에 끄달리면 안 됩니다. 임제스님도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끄달리지 않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끄달리면 마음이 쉬지를 못하고 들고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소리가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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