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기술+참선곡, 행불어록

자유인의 길 3.

혜주 慧柱 2006. 6. 25. 16:56

* 누가 주인인가 *

 

중생은 노비문서에 매인 몸과 같습니다. 그 노비문서란 애착과 탐욕의 습이며 중생은 그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노비가 노비문서를 사랑한다면 아마 누구나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착과 탐욕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는 웃는 사람은 적습니다.

신분을 생각해서, 혹은 권위 때문에 값비싼 옷을 입었다고 합시다. 그렇게 해야만 권위나 신분이 지켜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 옷 때문에 다리가 아파도 마음 편히 앉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주인입니까? 나 입니까? 옷 입니까? 아니면 권위나 신분이 주인입니까? 내가 옷을 입는 것입니까? 옷이 나를 입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고정관념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채로 지금 한발 한발 죽는 길을 따라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살면서 죽으려 가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인지 바로 보십시오. 그래야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자기를 되돌아보고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제 발길도 내다보지 못하고 자아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를 굳게 믿어야 중심을 잡고 살 텐데 스스로 자기를 믿지 못하니까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울고불고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과연 누가 주인인가를 알아보시라고 이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인 줄 알아서 그 주인한테 일임시키고 중심을 잡고 있으면 바람이 불어도 파도가 쳐도 끄떡없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보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 것은 참 자기, 주인공이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모든 재료가 다 갖춰져 있다는 사실, 여여하고, 청정하고, 자유 자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말로는 만물의 영장이라 하면서도 소견을 적게 쓰고, 따로따로 가르기를 일삼으니 지혜가 넓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나 일까요, 의식이 나의 주체일까요, 의지가 나의 주체일까요, 육신도 내가 아니고 의식도 내가 아니고 의지도 내가 아닙니다. 그러한 나라는 것을 비록 애지중지해 왔지만 모두다 비 실재요, 가 화합이요, 인연 소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허망하다 함도 당연하지요. 중생은 여태껏 그러한 나를 위해 살았고, 그러한 나를 진정한 나인 줄로 아는 그릇 소견을 갖고 있었기에 말입니다.

나의 의식이 주인이라 한다면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 혹시 이런 저런 일들이 성사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들이 뜻대로, 의지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님은 뜻대로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노예가 되고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사량심을 자기인 줄 알고, 그 사량심을 붙들고 육식과 더불어 아등바등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나’말고 진정한 나 - 주인공이 있음에도 바로 나를 있게 한 그 근본을 제쳐두고 ‘나 아닌 거짓 나’를 참 나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미생물에서부터 끝 간 데 없이 탈바꿈을 거듭하여 오늘의 자기가 형성되었건만 그것을 모르고 현실의 내가 바로 나인 줄 알고 급급해 하니 사람의 도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번뇌의 씨앗은 중생으로서의 ‘자기 사랑’입니다. 중생들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회한, 환희 등은 모두 중생의 자기 사랑일 뿐이니 어찌 그것을 진정한 자기 사랑이라 하겠습니까?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자기에게 영원한 기쁨과 만족을 주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번뇌와 고통을 안겨 주고 있으니 결국은 자기를 위한다면서 자기를 저주하는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전도몽상, 뒤집힌 헛꿈인 것입니다.

육신이 나의 주인이라 한다면 이렇게 되어라, 저렇게 되어라,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저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하고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라면 집이 헐어지는지, 고칠 곳이 어디인지 어느 부위에 고장이 일어났는지 정도는 소상히 알아 해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무엇이 싹을 틔워서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나를 싹 틔운 그는 누구인가? 곧 참나, 주인공입니다. 그럼에도 중생은 그 씨앗을 잊고서 ‘지금의 나’에게만 매달리기 때문에 온갖 고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씨’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최초의 씨앗은 이제 지금의 나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서 열매가 여물었다면 그 열매 곧 처음의 씨앗과 다르지 않으니 지금의 나 속에서 참 나를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씨를 찾아라! 네가 나오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찾아라!’하니까 제 씨는 제 속에 두고서, 작년의 씨가 제 씨인 줄 알고 바깥에서만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자기 안에, 자기 나오기 이전의 씨가 들어 있는 줄을 알아야 찾을 수 있습니다. 작년 씨는 화해서 이미 올 씨가 되었으니 바로 그 수박 안에 자기 씨가 원인이 되고 근본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인공! 하면 그 안에 일체 제불과 일체 선망 조상들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따로 밖에서 부처를 찾고 조상을 부른단 말입니까? 자기 독존을 관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좌선을 한답시고 모든 것을 끊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앉아서 관하라 한다면, 오히려 육신에 집착하게 되는 형국이므로 참다운 수행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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