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기술+참선곡, 행불어록

자유인의 길 7,

혜주 慧柱 2006. 6. 25. 17:18

아상(我相)을 버려라

 

, 나의 것이라는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자면 일체 경계를 둘()로 보지 말고 자기의 깊은 내면에 던져 버리는 수행이 반듯이 필요합니다.

내가 공부를 한다. 내가 일을 한다, 내가 잘 했다. 내가 주었다. 내 것이다. 나 이다. 하는 아집ㆍ아만ㆍ아상ㆍ욕심을 쑥 빼어 놓아야 합니다. ''가 들어가면 이미 걸린 것이니 당장 죽음을 눈앞에 닫쳤다 해도 탁! 넘어설 줄 알아야 제대로 놓는 게 됩니다.

 

나의 소유, 나의 생각, 나의 명예, 나의 가치 이런 것들이 다 나를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다. 중생들은 그런 것들을 경계에 부딪쳤을 때 싸워나갈 수 있는 방벽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방벽을 두텁고 높게 쌓으면 쌓을수록 내 마음은 위축되고 추워지는 법이니 결국 그러한 방벽이란 나를 보호하는 방벽이 아니라 나를 해치는 방벽, 나의 감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그런 감옥을 만들어 놓고는 고통스러우니 거기서 꺼내달라, 나가고 싶다고 아우성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미묘하게 숨어 있는 아만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직한 마음이며 슬기로운 마음인 것이니 마음을 닦으면 닦을수록 자기라는 껍질이 하나하나 벗겨져 모든 사람, 모든 생명과의 벽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 죽는다면 아무 것도 붙을 자리가 없어 욕심을 낼 것도 착(내려놓음)을 둘 것도, 남을 원망하고 싸우고 할 것도 없습니다. 가 살았기에 나로 인해 밖에서 들러붙고 안에서 일어나고 착이 붙고 욕심이 붙습니다. 하나 내동댕이 치면 그대로 극락이요, 모든 사람이 내가 되어 주는데도 말입니다.

 

누구든지 통에서 벗어나야 그 통을 굴릴 수가 있습니다. 나로소이다 하는 관념에 서로 잡혀 있는 것은 통 안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아 통을 굴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에서 훌쩍 벗어나 보면 그 동안 애지중지해 오던 나의 생각, 나의 법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도 알게 됩니다.

 

고정되게 붙들고 있는 관념을 부숴 버리세요. 내가 죄를 지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하는 따위의 관념을 다 버리세요. 그것을 붙들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벽인 것입니다.

 

가 있다는 생각이 나가 없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낳게 됩니다. 죽음이 그래서 두렵고 무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의 것이 있다는 생각이 나의 것이 없는데 대한 불안과 공포를 낳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참 나는 생도 멸도 없습니다. 생멸이 없으니 나의 것이 있음도, ; 나의 것이 없음도 없습니다. 오직 소유에 집착하는 나툼이 있을 뿐입니다.

 

중생의 자기 사랑이 바로 번뇌의 씨앗입니다. 고로 중생들의 자기 사랑이란 참다운 사랑이 아니라 한낱 뒤집힌 꿈일 뿐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려거든 먼저 아만ㆍ아집ㆍ아상을 버려야 합니다. 빈 그릇이 되라는 것이지요.

빈 그릇이라야 새 것을 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채워져 있는 그릇에는 새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라는 생각, 내가 제일이라는 자만심, 집착 애욕 따위가 차곡차곡 담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넣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뱃속도 비워져야 음식을 멋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본래는 개별적으로 라고 고집할 수 있는 절대적인 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 일체 만물 만생이 한 방 식구인 것입니다.

 

현상계의 모든 것은 맞물려 돌아 갑니다. 어느 하나라도 독립적, 절대적인 것은 없고 오직 상대성 연기성만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는 것입니다.

생과 사, 남과 여, 높은 것과 낮은 것, 선과 악, 동과 서 등등이 그렇게 맞물려 돌아갑니다. 태어남이 있으니 죽음이 있지요. 뿐만 아니라 를 놓고 보아도 어느 때는 아버지요, 어느 때는 자식이요, 남편이요, 형이요, 동생이요, 상황에 따라 이름과 역할이 다릅니다. 고정된 게 없습니다. 우주 만물이 다 그렇게 독립적으로 고정되질 않고 상대적으로 서로 물려서 쉴새 없이 돌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내 부모께서 돌아가셔서 바로 이웃집 아이로 태어난다 해도 여러분은 모르실 것입니다. 전생의 조상이 지금 내 집에 들어와 같이 산다 해도 여러분은 모르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들판에 나뒹구는 해골을 보시고 절을 했다는 말을 알고 있지요.

같이 산다 해서 내 자식, 내 부모라고 고정되게 규정할 수 없고 따로 산다 해서 네 자식, 네 부모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찰나로 인연 따라 만나지고 헤어지고 할 뿐이니 내 자식 네 자식, 내 부모 네 부모가 본래는 따로따로 아닌 것입니다. 하물며 내 것, 네 것 하겠습니까?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도 다 공이요, 우주 삼라만상도 다 공입니다. 그러나 공이라 해서 아무 것도 없다, 텅 비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텅 비었다는 것은 곽 찼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냥 둥글게 궁글어 졌다는 뜻입니다. 찰나도 고정됨이 없이 나투어 돌아가니까, 이것이다! 라고 말할 게 없어 공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 라 함도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으니까 무! 라 하기도 하고 그것으로도 성이 안차니까 무에 무, 또 무라고 합니다. 이요 입니다.

 

우리의 이 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포가 모여 있는 공동체이지, 단지 하나만으로 고정되어 있는 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에게도 그 어떠한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라면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되며, 부모님에게는 아들이 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로 남편에게는 아내, 자식에게는 어머니, 부모님에게는 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순간순간 수 없이 많은 역할로 나투면서 공동체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과연 어떤 것을 가지고 진정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일을 할 때에, 어떤 행을 할 때에, 어떤 생각을 할 때에 진정 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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