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불교는 부처님 법 답게 "본마음, 참 나"

혜주 慧柱 2021. 7. 30. 06:01

불성이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화엄경』에

若人欲了知 : 만약 어떤 사람이 깨달음의 마음을 내었다면

三世一切佛 : 삼세(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

應觀法界性 : 법계의 성품을 응당히 관찰하라.

一切唯心造 : 모든 것은 오직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본마음 : 성품, 불성 = 공성 = 자성

② 마음 : 분별심

 

하나는 본마음, 즉 성품입니다. 불성(佛性), 공성(空性), 자성(自性)이라고도 합니다.

모두 ‘성(性)’자가 들어갑니다. 성(性)은 마음 심(心)변에 날 생(生)자입니다.

마음이 생겨난 곳이지요. 즉 성품은 마음의 출생지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흔히 쓰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아! 나는 마음이 언짢아. 마음이 슬퍼. 마음이 어때….’

이럴 때 쓰는 마음으로, 분별심입니다. 분별심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분별심이 마음인 줄 알고 내 마음, 네 마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성품은 이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로, 본마음이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합니다.

 

불성은 부처가 될 가능성입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데 무엇인들 될 수 없겠습니까?

신도, 인간도, 축생도 될 수 있습니다.

내 작품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 안에 심장이 있듯이, 불성도 몸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불성은 어떤 존재가 아니고 존재하게 해주는 가능성입니다.

텅 비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는 가능성, 공성입니다.

 

또한 부처님만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너도나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어 자성입니다.

참선할 때 자성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자기의 성품을 보는 것, 이것이 참선의 견성 수행입니다.

 

경전에서는 불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결국 다 같은 말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원불설(願佛說)을 말하는데, 다른 종교에서는 원죄설(原罪說)을 말합니다.

원죄설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신과의 약속을 깨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원래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인간은 본래 부처이고, 지금도 부처이고, 앞으로도 부처가 될 것이다.”

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원불설입니다.

그래서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응당 법계의 성품을 관찰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법계는 진리의 세계를 말합니다.

즉 진리 세계의 성품, 자성, 공성, 불성, 본마음, 이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성품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몸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는 관찰자, 이것이 성품입니다.

여러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다 알아듣잖아요.

그것은 성품이 알아듣는 것이지, 분별심이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심은 할 줄 아는 것이 딱 한 가지, 시비를 분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육근을 보고 육신을 끌고 다니는 것은 분별심이 아니라 성품입니다.

여러분이 제 말을 알아듣는 것도 성품자리입니다.

여러분의 성품자리가 ‘나는 본래 크고 밝고 완전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첫 번째가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관찰할 줄 알아야 관찰자라는 개념을 알게 됩니다.

숨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바로 본마음, 성품입니다.

이것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꾸준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품을 보게 됩니다.

이 성품자리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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