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스트레스는 게스트다

혜주 慧柱 2021. 10. 16. 07:42

사진은 하루를 시작하는 먼동이고, 글은 얼마전 일과 마치고 잠시 만들어 본 것입니다. ㅋㅋ

 

스트레스는 게스트guest.

 

손가락을 움직여도 보는 성품은 부동이요,

티끌은 움직여도 허공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중생들은 요동하는 것으로 티끌을 삼고

머물지 않는 것으로 손님을 삼아야 한다.

 

능엄경견불객진遣拂客塵이라고 나옵니다. 보낼 견, 털어 낼 불자입니다. 큰 스님들이 불자를 흔든다고 그러는데, 같은 불자를 씁니다. 불자란 총채같이 생긴 것으로, 먼지를 털어 내거나 파라나 모기를 쫓아내는 데 사용합니다. 은 손님이고, 은 티끌입니다. 손님은 보내고 먼지는 털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스트레스는 본래 주인이 아니고 게스트입니다. 손님이 왔으면 얼른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 상책입니다.

 

소리는 생멸이 있으나

소리를 듣는 성품은 항상 존재한다.

 

능엄경에 나오는 성유생멸聲惟生滅 문성상재聞性常在라는 말입니다. 종을 딱 치면 소리가 생겨났다가 점 점 점 점 줄어들어서 없어집니다. 이것이 생멸입니다. 이렇듯 소리는 생멸이 있으나 소리를 듣는 성품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소리가 생겨났다고 성품도 따라 생겨나고, 소리가 없어졌다고 성품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품이 주인이고, 소리는 게스트입니다. 그것처럼 스트레스는 게스트입니다.

주인과 손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거꾸로 손님을 주인으로 알고, 본래 주인은 있는지조차 모르면 안 됩니다. 손님이 왔을 때는 빨리 내보내야 합니다. 손님을 오랫동안 놔두면 주인 행세를 하려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것도 초기에 내보내야 잘 나갑니다. 들어왔는데 방치하면 잘 나가지 않습니다. 내 집이라 여기고 눌어붙으려 합니다.

구명시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관음시식과 화엄시식입니다. 관음시식은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영가를 달래서 내보내는 것이고, 화엄시식은 화엄신중을 모시고 영가에게 겁을 주어서 내보내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관음시식을 주로 하지만, 좀 험악하게 죽었거나 애착이 많은 영가 또는 문제가 있을 때는 화엄시식을 합니다.

 

잡념이 일어나면 곧 바로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면 곧 사라지리라.

 

좌선의에 나오는 염기즉각念起卽覺 각지즉실覺之卽失이라는 말입니다. 잡념이 일어나면 곧바로, ‘잡념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알아차려야 하듯이,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스트레스 손님이 왔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되도록 빨리 보내야 합니다.

 

인과 연으로 생겨난 존재를

나는 곧 공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것은 가명이며

또 이것이 중도의 이치이다.

 

중론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 역위시가명亦爲是假名 역시중도의亦是中道義라고 나오는 게송입니다.

과 연이 만나서 생겼으니까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있는 이름, 가명이고, 또 이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중도中道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있습니까, 없습니까? 몸뚱이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앞으로 얼마 후에는(우주의 나이에 대비) 어떻게 될까요?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지금 있지만 없어지고, 또 없어진다고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납니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다시 생겨나는 것,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중도에는 고락중도와 유무중도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설하신 법문인 중도법이 고락중도입니다. “너희는 고행도 하지 말고 쾌락에도 빠지지 마라.” 고통과 쾌락의 중도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무중도는 앞에서 설명한 유와 무의 중도입니다. 우리가 백 년 천 년을 살 것처럼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내일 죽을지, 십 년 후에 죽을지, 삼십 년 후에 죽을지 모릅니다. 없어지는 것이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데 너무 애착하지 말고, 없는 데 너무 애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없는 데다 너무 초점을 맞추고 살다 보면 현실을 무시하게 됩니다. 현실을 무시해도 안 되지만 너무 애착해서도 안 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치에 입각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범부는 잡념이 생겨나서 머물렀다

사그라져야 비로소 알아차린다.

초발심보살은 잡념이 생겨나서

머무르는 동안 알아차려 내보낸다.

일정 경지에 오른 보살은 잡념이

일어나자마자 알아차려 내보낸다.

보살 십지에 이른 이는 방편으로

생각 일으키나 일으켰다는 생각이 없다.

 

대승기신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마음공부가 될수록 빨리 알아차리고 빨리 내보낼 수 있습니다. 범부는 생주이멸生住異滅, 마음이 생겨나 머물고 변화하다 소멸하는 과정을 다 겪어야 그때서야 알아차립니다. 초발심보살은 잡념이 생겨나서 머무르는 동안 알아차려 내보냅니다. 일정 경지에 오른 보살은 잡념이 일어나자마자 알아차려 내보냅니다. 보살 십지까지 이른 이는 방편으로 생각을 일으키지만 거기에 매이지 않습니다.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만 거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